*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4/06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한순간도 우리 자신의 문제와 삶 그 자체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욕심과 욕망이 지나쳐서 그것이 충족되지 못하면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당분간 욕구를 완전하게 억제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만일 네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을 욕구한다면, 너는 반드시 불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네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추구하지[요구하지] 말고, 오히려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것”이라고 말한다.
있지도 않은 것, 생기지도 않은 것, 일어나지도 않은 것을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평정심이 늘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몸에 관련된 것들은 겨우 필요한 만큼만 취하라...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사치스러운 모든 것과는 단절하라.” 당연한 교훈 같지만 우리는 지금 육체적 욕망에 시간과 돈을 너무 많이 투자하고 있다. 몸에 관심을 기울이고 몸을 위해서 좋은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을수록 그와는 반대로 이성과 정신은 더 혼탁해진다. 몸은 부족한 듯이 자족․자제하면서 살아갈 때에 정신은 오히려 맑아진다. “많이 운동하는 것, 많이 먹는 것, 많이 마시는 것, 많이 배설하는 것, 성교하는 것과 같은, 신체와 관련된 일들에 지나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재능 없음의 징표이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곁다리로 해야만 하고, 너의 온 관심은 정신에 쏟아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어느 것이 더 행복하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삶에 대해서 좀 더 겸손해지고 순수한 정신을 지향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매순간 죽음을 생각하면 된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 맞닥뜨린 사람처럼 시간을 살아간다면 구태여 욕심을 부리고 육체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이미 무(無)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죽음, 추방, 그 밖의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다른 모든 것들을 날마다 네 눈앞에 놔두어야 한다. 특히 모든 것들 중에서 죽음을. 그러면 너는 결코 그 어떤 비참한 생각도 가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어떤 것을 지나치게 욕망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죽음이 지금-여기에-와-있음이라는 실존적 상황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무가 되는 것이고, 놔두어야 할 것들이다. 욕망을 놓아두고 사물을 놓아두기 위해서는 죽음을 내 눈앞에 끌어다 놓아야 한다.
“철학에서 제일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제는 철학적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제 철학적 깨달음은 사변이나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온전한 것이 못된다. 완전한 의미의 깨달음, 무감동과 평정심은 실제의 삶에서 실현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의 욕망이나 죽음조차도 한갓 철학적 사변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앞당겨진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실존적 결단이 인간을 완전히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무엇을 축적하는 연속적인 과정이 아니다. 일회성으로 부여받은 삶은 행운이자 고마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픽테토스의 이름이 상징하는 듯이, 인생이란 그저 “곁다리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천격스러운 것일까?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에픽테토스, 삶에는 반드시 평정이 필요하다!
에픽테토스(Epictetus/ Epiktetos, BCE 50/60-130/135)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지금의 터키 서남쪽에 있는 퓌리기아 지방의 히에라폴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스승들은 학파를 창시한 카티온 출신의 제논을 비롯하여 아소스 출신의 클레안테스였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인간이 외부의 어떠한 상황이나 문제에도 흔들리지 않는 무정념(혹은 무감동, apatheia)과 역시 마음이 늘 변함없고 잔잔한 평정(ataraxia)을 요구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한순간도 우리 자신의 문제와 삶 그 자체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욕심과 욕망이 지나쳐서 그것이 충족되지 못하면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당분간 욕구를 완전하게 억제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만일 네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을 욕구한다면, 너는 반드시 불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네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추구하지[요구하지] 말고, 오히려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것”이라고 말한다.
있지도 않은 것, 생기지도 않은 것, 일어나지도 않은 것을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평정심이 늘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몸에 관련된 것들은 겨우 필요한 만큼만 취하라...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사치스러운 모든 것과는 단절하라.” 당연한 교훈 같지만 우리는 지금 육체적 욕망에 시간과 돈을 너무 많이 투자하고 있다. 몸에 관심을 기울이고 몸을 위해서 좋은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을수록 그와는 반대로 이성과 정신은 더 혼탁해진다. 몸은 부족한 듯이 자족․자제하면서 살아갈 때에 정신은 오히려 맑아진다. “많이 운동하는 것, 많이 먹는 것, 많이 마시는 것, 많이 배설하는 것, 성교하는 것과 같은, 신체와 관련된 일들에 지나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재능 없음의 징표이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곁다리로 해야만 하고, 너의 온 관심은 정신에 쏟아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어느 것이 더 행복하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삶에 대해서 좀 더 겸손해지고 순수한 정신을 지향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매순간 죽음을 생각하면 된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 맞닥뜨린 사람처럼 시간을 살아간다면 구태여 욕심을 부리고 육체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이미 무(無)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죽음, 추방, 그 밖의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다른 모든 것들을 날마다 네 눈앞에 놔두어야 한다. 특히 모든 것들 중에서 죽음을. 그러면 너는 결코 그 어떤 비참한 생각도 가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어떤 것을 지나치게 욕망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죽음이 지금-여기에-와-있음이라는 실존적 상황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무가 되는 것이고, 놔두어야 할 것들이다. 욕망을 놓아두고 사물을 놓아두기 위해서는 죽음을 내 눈앞에 끌어다 놓아야 한다.
“철학에서 제일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제는 철학적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제 철학적 깨달음은 사변이나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온전한 것이 못된다. 완전한 의미의 깨달음, 무감동과 평정심은 실제의 삶에서 실현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의 욕망이나 죽음조차도 한갓 철학적 사변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앞당겨진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실존적 결단이 인간을 완전히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무엇을 축적하는 연속적인 과정이 아니다. 일회성으로 부여받은 삶은 행운이자 고마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픽테토스의 이름이 상징하는 듯이, 인생이란 그저 “곁다리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천격스러운 것일까?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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