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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홍원준 논객 칼럼

에스컬레이터 사회-계단이 사라진, 관계가 해체된 사회

by anarchopists 2019. 10.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7/02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에스컬레이터 사회-계단이 사라진, 관계가 해체된 사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출퇴근, 등하교에 지하철을 이용한다. 그리고 그 깊숙한 지하철에 도달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에스컬레이터이다.
저 깊디깊은 곳에 다다르기 위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고 그 흐름에 오름과 내림에 몸을 맡긴 채 모두 같은 곳을 향한다. 그것이 지하든 지상이든 가고자 하는 방법은 이것으로 획일화 되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많은 사람들이 ‘시간은 금’이라는 자본주의 관념 아래에서 그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며 이를 ‘효율적’이라고 보고 한줄서기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마치 그 에스컬레이터가 영원히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인 마냥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 그 힘에 의해 기계는 마모되고 망가져 언젠가 뒤틀어지는 것은 자명하지만 올라가는 이들은 이런 인식 따위 안중에도 없는 마냥 그저 앞만 보고 목표를 향해 다가갈 뿐이다. 그리고 주변에 대한 신경 따위는 둔해져간다.


‘시간은 금’이라는 교육되어진-혹은 세뇌되어진- 명령 앞에서 인간은 아무런 저항하지 못한다. 이 명령에 의해 삶은 사라진 채 시간으로 수량화 되어 금-자본-으로 나타날 뿐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자본을 위해 봉사하는 ‘시간’으로 전락해버린 인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은 그저 자본의 취득을 위해 봉사할 것이며, 이 집착은 타인은 물론 자신마저 잊게끔 할 수 있다. 자신마저 잊어버린 이 상태는 결국 더욱 자본에 집착하여 자본에 기생하는 관념-이미지-을 취득하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역설적인 현상과 마주한다. 하지만 이 관념은 언뜻 보기엔 개성을 말해주고 나를 나타낸다고 느낄지 몰라도 그 근저에는 자본만이 존재하는 것이어서 저 집착에 함몰된 이들은 모두 이를 따르기에 일반을 탄생시키고 대중을 생산해낼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서 ‘효율적’이란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결국 경제적 가치, 자본의 가치를 말하고 최소 투자, 최대 이익을 뜻하지 않는가? 과연 ‘효율적’이라는 말이 그런 가치에 절대적 기준으로만 표현이 가능한가? 오히려 ‘효율적’이라면 저런 자본의 가치만이 아니라, 자본으로 산정될 수 없는 가치들도 말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만 진정 인간을 위한 ‘효율적’인 행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을 위한다는 것이 개인이 마주한 삶에서 자신의 삶을 표현할 수 있고, 보장 받을 수 있으며, 안위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효율적’인 상황에서 인간을 위한다기보다 자본을 위한 행위-한줄서기-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이 시스템의 영구성을 믿는 것이라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발을 힘차게 걸어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있을 수 있고, 걸어 올라갈 수 있다.


종종 아이들을 보면 에스컬레이터를 밟고 올라가기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목격한다. 이 아이들은 아직 그 믿음에 의해 감각이-이 에스컬레이터가 언젠가 무너질 수 있다는 직관 같은 것- 아직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 아이들에게 세뇌를 한다. 이것은 안전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그러니 한 번 타고 올라가보라고 얼마나 편안하고 안락한지를. 이제 그들은 조심스레 한걸음 그 위로 올라탄다. 그리곤 고작 몇 번의 단편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감각이 언제 그 두려움을 말했냐는 것처럼 오히려 그 위에서 뛰놀고 즐기기 바쁘다. 그렇게 그들은 무조건적 신뢰를 그것에게 투영한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 아직까지 우리는 계단이라는 요소를 마주할 수 있으며, 그것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스스로 운동해야하고 주변을 살펴야하며 상황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계단에서 관계의 열림을 경험할 수 있다. 가끔 어르신, 노인분들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구부정한 자세로 그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젊은 우리들은 그분들에게 도와드려도 되냐는 요청을 한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그 두 사람에게 어떠한 것도 요구하는 것이 아니며, 그저 감각의 발현으로 인해 서로 관계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의 감정이입을 통한 고마움과 뿌듯함이 느껴질 것이고, 소통할 수 있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개개인이 타자로 나눠진, 분리된, 경계 지어진 한계를 넘어서 공동체로써 매듭지어질 수 있다.


오늘도 어디선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향하는 계단을 없애버리고 에스컬레이터를 만들어내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그 에스컬레이터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타고 내려가며 조그마한 화면에 갇힌 채 자신이 현재 몸담고 있는 현재와 괴리된 현상을 보여줄 것이다. 각자는 각자 모래알처럼 흩어져 스스로 무거운 짐을 옆에 두고 살기 좋아졌다며 만족할는지 모른다. 주변의 상황 따위는 단절하고 제 갈 길에 분주한 이들의 모습에서 과연 살기 좋아진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개인으로 고립되어 같이 이야기 나누고 관계할 기회의 종말로 치닫고 있으며, 삭막해지고 닫혀버린 현재와 조우하고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관계를 찾기 위해 자본에 종속된 관계만을 추구한다면 더 깊은 심연 속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저 맹목적, 종교적 믿음의 관계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처음에 그것과 마주했던 그 두려움을, 그 감각에 주목해야 한
다. 그리고 계단이라는 단단한 땅을 기반으로 한 것을 자신의 두 다리로 걸어 오르고 내리며, 주변을 보고 관계를 열어 각자 갇혀 있던 고립에서 벗어나 함께하는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다.
스스로 내딛은 발로 만들어가는 공동체를 통해 진정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근저가 되고 고유성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마주한 상황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로 말해 질 수 있다. 이런 고유성이 만연할 수 있는 감각으로의 이행을 위해 주어진 채 일렬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보단 각자의 방법으로 걸어갈 수 있으며 관계 맺어질 수 있는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이다.


*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홍원준 필자는
숭실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평소 사회, 정치, 문화 등에 비판적 의식을 견지해왔습니다.

그래서 의생명시스템학과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꿀 정도로 존재, 사유, 실존, 본래성 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철학도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철학의 인식론을 중심으로 촘스키와 같은 언어철학자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젊은이로서, 우리 사회 진보에 대한 대안제시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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