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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홍원준 논객 칼럼

나홀로 볼링-자본을 위한 사회, 이것을 넘어서 관계-예술의 공동체

by anarchopists 2019. 10.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6/12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나홀로 볼링-자본을 위한 사회, 이것을 넘어서 관계-예술의 공동체



로버트 퍼트넘은 1960년대 이후 미국사회의 사회적 자본의 쇠퇴를 보면서 해당 논문을 쓰고 단행본을 마무리한다. 당시 2차 세계 대전 이후 경쟁의식 바탕에서 자라난 세대들이 사회에 나오면서 기존의 단체들이나 조합들이 무너지는 현상을 보고 판단한 것이다. 분명 현상을 바라보는 것은 적절했고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 또한 타당하다고 본다. 또 이를 현대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로 보기에 우리가 마주한 현상들이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철저히 ‘당장’과 ‘자신’을 위한 사회적 인식이 다분해졌고 ‘미래’나 ‘후손’을 위한 걱정은 배부른 소리가 된지 오래이다. 지금 나도 힘든데 길거리에 폐지 줍고 구걸하는 사람 도와줄 여유가 어디 있으며 태어나지도 오지도 않은 ‘미래’와 ‘후손’을 걱정하는 것은 너무도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미래’, ‘후손’은 지금은 보일지 않더라도 우리가 분명 당면할, 당면하고 있는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점에서 퍼트남이 말한 ‘연계’라는 개념은 분명 우리가 주목해야하고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이다.


그러나 퍼트남은 자본주의 및 현대라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사회를 판단, 분류하고 ‘사회적 자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과 같은 사회가 된 배경에는 분명 자본주의라는 중요한 요소가 있었고 그 바탕에서 위와 같은 현상을 마주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의 맹점을 비판하기보다는 다시금 그 테두리 안에서 한정된 요소로 다시금 사회를 연계해보고자 하는 수정적, 합의적, 임시방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따름이다. 개인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사회가 필요하고 사회는 이를 바탕으로 ‘생산성’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사회적 자본’의 한계인 것이다. ‘이익’과 ‘생산성’에 부합하지 않거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은 언제든지 배제될 수 있고 양적으로, 숫자로 환원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물론 자본주의는 이러한 것도 말하고자 손아귀를 뻗쳐올 것이 분명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 말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가령 극단적인 예를 들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개인이 ‘이익’과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집안에 주부들이 다른 집에 가서 살림을 하고 봉급을 받고 이를 통해 소비해야하는 멍청한 행위를 행해야 한다. 그가 ‘사회적 자본’의 가치라고 말한 “신뢰, 동료애, 동정심” 등도 자본으로 환원되어야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자본을 위한 사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위한 사회는 분명 그 위하는 것에 함몰되어 인간들은 사라지고 그 시대만이 남으며 시대에 부합하여 성공 ‘신화’를 쓴 몇몇에게만 권력과 자유가 주어진다. 유사 이래 역사는 이처럼 무엇인가를 위하는 사회와 그 사회와 단절을 하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위하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을 반복하고 지속해왔다. 이를 위해 권력자는 해당 시대에 부합하는 종교를 만들어내고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종교화, 신성화시켜 절대화하고자 하며 자신의 당위성을 인정받으려 한다. 중세의 기독교가 서구의 권력자들과 부합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 및 삶은 지워지고 중세시대의 이름 모를 인간들로 남아 죽은 뒤 천국을 바라는,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는, 예수의 재림을 기원하는, 메시아의 예언을 기대하는 수동적인 인간들만 남았다. 그러한 바탕에서 상위의 인간들은 그저 ‘당장’,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그들을 이용하고 억누르고 마찬가지로 그들도 그 권력에 취해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켰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익, 생산성, 자본의 추구’라는 실타래에 묶인 채 인형극의 인형처럼 실타래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손을 뻗고 발걸음을 하고 고개를 숙인다. TV, 인터넷에서 나오는 성공 이야기를 ‘신화’로 받아들이고 그를 벤치마킹하여 그와 같이 삶을 사려는 인식 속에서 자신의 삶은 사라지고 제2의 그 혹은 그에게는 모자란 존재가 되며 모든 이유는 자신의 능력의 부족이라고 자기성찰을 하는 참된 자본인이 대다수이다. 경쟁률이 100:1이건 1,000,000:1이건 내가 ‘1’에 들지 못하는 것은 나의 부족, 나의 한계라 겸허히 받아들이고 순응한다. 이 모든 것은 철저히 ‘이익, 생산성, 자본의 추구’이기에 그 속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책망하던 중 퍼트남이 ‘사회적 자본’의 부족함을 이야기하자 이제부터는 ‘사회적 자본’까지 쌓아 성공 ‘신화’를 쓰고자 한다면 결국 그의 책 속에서 뛰어다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냥 제 2의 퍼트남일 뿐이다. 성공한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성공을 맛보았기에, 성공만을 바라보았기에 더욱더 그 논리에 종속되고 스스로를 묶어버리는 짓을 하게 될 뿐이다.


시대를 종언하기 위해, 나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신화’가 아닌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나는 ‘100’도 ‘1,000,000‘도 ‘1’이 아닌 ‘내’가 되어야 하고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이 공동체는 무엇인가를 위하는 것이 아니어서 어떤 삶의 모델이나 기준을 던져주지 못한다. 그저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위하지 않는 공동체 속에 ‘나’를 발견하고 무엇인가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을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내가 본 것을 그릴 수 있으며, 내가 들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실현될 수 있다. 여기서 보이는 진실성이란 그 가치는 세상에 하나라는 절대성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통해서 수많은이라는 상대성을 추구할 수 있기에 그 이분법적인 나눔은 허물어질 수 있다. 그러면서 각자가 받아들이는 다양한 관점으로 ‘비평가’, ‘평론가’가 말하는 단편적인 평가가 아닌, 단편적으로 말할 수 없는 모호함의 평가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소통 속에서 작가와 관찰자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서로의 삶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관계의 열림이 가능하다. 바로 이 관계의 열림 이것이 바로 예술이고 이를 추구하는 공동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인간을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비롯되어 서로를 고유한 가치로 받아들일 줄 알고 인정하는 관계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무엇인가에 의해 가치의 우선을 판단할 수 없을 것이며 직접 마주한 상황에서 비롯된 인식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논할 뿐이다. 이러한 논함에서 다양한 방식, 다양한 관점이 나타나고 각자는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내릴 수 있는 주체로 활동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이러한 환경이 아니라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가로막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일 뿐이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인식을 바꾸고 그 방향을 향해 스스로 걸어간다면 그것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쉽게 주변 환경이 변하는 것보다 자신이 그 환경에 맞추는 것이 이치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환경은 우리가 움직이면 바뀌는 것이고 인식을 달리
하면 다르게 보이고 넘어설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환경은 주어지며 절대적인 불변의 것이 아니다. 그저 당신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빨간약과 파란약 중에서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진실로 마주한 현실은 비참하고 어두운 면만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다시 현실을 도피해 하이퍼-리얼리티가 주는 쾌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시대에 함몰된 인간일 뿐이다. 어두운 허무적인 현실을 마주하지만 그 속에서 누군가는 살아있음을 또 그 누군가와 진정 마주할 수 있는 것을 느끼고 마주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 폐허에서 누군가에게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닌 나에 의해서 더 자유롭고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을 행위 할 수 있는 단단한 바탕이 되지 않을까?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홍원준 필자는
숭실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평소 사회, 정치, 문화 등에 비판적 의식을 견지해왔습니다.

그래서 의생명시스템학과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꿀 정도로 존재, 사유, 실존, 본래성 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철학도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철학의 인식론을 중심으로 촘스키와 같은 언어철학자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젊은이로서, 우리 사회 진보에 대한 대안제시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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