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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홍원준 논객 칼럼

스피노자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정념

by anarchopists 2019. 10.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6/21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스피노자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정념



우리는 자본주의-신자유주의-라는 사회에 태어났고 부모, 친척, 사회, 국가 등에 태어나졌다. 결코 현재 상황을 우리가 만들지도 선택하지 않았으며 환경 또한 그저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태에서 대부분의 개인들은 그저 그 상황에 지배적인 담론이나 정념에 끌려가는 현상이 발견된다. 마치 지금 우리가 지금 빚과 취업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희망을 삶의 이정표로 보고 있는 것처럼. 이런 사람들은 말한다. “그럼 도대체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고 우리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며 결국 벗어날 수 없다면 그냥 이러한 상황에 자신을 던져버리고 그냥 체념하는 것이 낫다고.” 자신이 지배할 수,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운명적으로 순응하면서 사는 것이 속편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상황과 그 틀의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저러한 것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같은 것으로 느껴져 절대적이며 불변하며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즉 신처럼 아니 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행위를 위처럼 정당화, 합리화, 타당화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것이 과연 타당한 관념에서 비롯된 행위인가?



현대인의 삶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오히려 타당하지 못한 정념에 휘둘려 자신의 코나투스를 발현하지 못하고 그저 정념에 이끌려간 삶을 살고 나중에 후회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성에서 비롯된 자기 이익을 실현하지 못한 인간들의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이성적 자기 이익을 실천하지 못하니 지금도 누군가는 어디선가 굶어 죽고 있고 누군가는 간단한 질병조차 치료하지 못하여 죽어가고 있으며 누군가는 사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무엇인가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론적 가치를 말하고자 하고 있다.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고 어떤 곳에 살고 어떤 학교를 나왔고 어떤 직장에 다니는지를 통해 자신을 존재시킨다. 이 ‘어떤’이라는 사회적 가치로 가치판단을 하고 있다. 우리는 현대의 신을 위해 자기애 따위는 잊어버렸다. (자전거를 타는 본인은 자전거의 ‘상처’가 본인의 몸에 난 ‘상처’보다 아프게 느껴진다.) 자신의 존재적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 것이다. 이 아이러니함, 혼란함 속에서 타당화에 실패한 이들은 극단적인 선택-자살-을 하는 경우도 보인다. 자기 보존조차 유지할 수 없는 이런 정념은 결국 타당하지 못한 정념이라 보일 뿐이다. 이에 이끌려 이것을 신이라 추종하는 것은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 것이며 따라서 현 상황에 대한 궁극적인 비판, 저항, 불복종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이는 그 상황에 맞게끔 타협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다. 타협하는 것은 결국 저 타당하지 못한 것을 알아도 받아들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이성을 키우고 이로써 지금을 사유하여 타당한 관념에 맡게끔 실천하는 것이 자기를 발견-발현하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하지만 우리는 유한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선을 추구하는 삶에 있어서도 외부적 요인이나 타당하지 못한 정념에 휘둘려 결국 후회하는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타당하지 못한 관념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분명 우리는 21세기, 한국, 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다는 한계에 머물러 그 안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것-타당한 관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된다. 어떤 결과를 위한 혹은 가시적 목적을 위한 것이기 보다 자기 보존을 위한다는 자명한 것을 동기로 삼는 것일 뿐이다.



파울 클레의 그림이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라고 하는, 천사 하나가 그려져 있다. 마치 그의 시선이 응시하는 곳으로부터 떨어지려고 하는듯한 모습으로, 그의 눈은 찢어졌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그의 날개는 활짝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아마 이런 모습이리라. 그의 몸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거기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눈앞에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그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끊임없이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가며 그 폐허들을 천사의 발 앞에 내던지며 펼쳐지는 파국을.



아마 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한데 모으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한 줄기 난폭한 바람이 파라다이스로부터 불어와 그의 날개에 부딪치고, 이 바람이 너무나 강하여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이 난폭한 바람이 천사를 끊임없이 그가 등을 돌린 미래로 날려 보내고, 그동안 그의 눈앞에서 폐허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간다. 우리가 ‘진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이리라.-「역사의 개념에 관하여」, 발터 벤야민



날개를 편 천사, 그것은 헛된 저항이다. 아무리 날갯짓을 하려해도 천사는 파라다이스로 날아갈 수가 없다. 그래도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강한 바람 때문에 접으려 해도 접히지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저항을 한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그렇다고 저항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바람 때문에 우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저항을 위해 우리 자신에게 장밋빛 미래의 헛된 약속을 할 필요는 없다. 성급하게 급조된 희망의 그림을 그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저 저항을 할 뿐이다.-「앙겔루스 노부스」,진중권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홍원준 필자는
숭실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평소 사회, 정치, 문화 등에 비판적 의식을 견지해왔습니다.

그래서 의생명시스템학과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꿀 정도로 존재, 사유, 실존, 본래성 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철학도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철학의 인식론을 중심으로 촘스키와 같은 언어철학자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젊은이로서, 우리 사회 진보에 대한 대안제시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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