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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홍원준 논객 칼럼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본 북한

by anarchopists 2019. 10.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6/24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본 북한



북한과 남한은 1945년 해방 이후 ‘이념의 틀림’으로 인해 분단되어져 결국 최후의 비극인 한국전쟁에까지 치달았으며 그 이후로도 수많은 크고 작은 충돌들이 계속되어왔다.
기성세대들은 이러한 상황을 경험적으로 직접 보고 겪으면서 그리고 우리들은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자라나면서 ‘이념의 틀림’을 교육받고 충돌로 인해 나타난 악영향들을 통해 북한을 나쁨의 혹은 악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북한을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가능하다. 북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이 듣고 보이는 남한은 그저 대립의 대상으로 언젠가 무너뜨려야할 대상으로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들이 나타나는 과정에서 과연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감정을 통해 느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철저하게 북한 사람들을 직접 만날 수 없는 현실로 인해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언론에서 나타나는 단편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이며 북한 사람들도 우리를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또한 각자 교육 받기를 위의 단편적 사례-전쟁, 충돌 등의 극단적 상황-를 통해서만 하는 것이기에 마치 그들이 우리에게 위협의 대상인 것처럼 느껴지게끔 서로가 조작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자라 나타날 수 있는 대다수의 인간들은 분명 서로를 ‘틀림’의 대상으로 밖에 인식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북한 사람 혹은 남한 사람이기 전에 실존하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그리고 바탕을 두어야할 곳은 바로 이것이다. 분명 그 누구도 자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선택하고 태어날 수 없으며 이것은 너무도 필연적인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대상황에 노출되어 한계지어지고 그 시대의 사람으로 후대에 불리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시대를 만들어가는 것도 우리들이며 어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우연함도 가지고 있다. 외부의-교육, 단편적인 사건- 요인으로 나타나는 적대시 하는 감정은 우리에게서 발현한 것이 아니며 시대적 상황에 한계에 의해 주입된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지금에 갇힌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을 넘어서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느낄 수 있는 자신으로부터 현현되는 그러면서 동시에 실존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닫혀있던 서로에 대한 관계의 열림을 통해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상황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길가의 꽃을 꺾어 꽃병에 두고 관조하는 것이 아닌 꽃과 그것이 있는 길가 의 풍경과 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꽃이 아닌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꺾지 않는’ 우연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며 꺾지 않음을 선택해 새로움을 맛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인간 대 인간으로 -실존으로 어떠한 ‘이념’이나 ‘극단적 사건’을 넘어서- 서로에 대해 교육하고 바라본다면 대립의 감정보다는 민족으로서 동질감 또 이를 넘어 인류애를 통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시선이 대다수가 되지 않을까? 여태까지 외부적인 요인과 상황으로 인해 타당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감정이 우리를 얽매 서로를 비난하고 대치하는 국면이었다면 이제는 자기 보존을 위한 타당한 것에서 비롯하여 공존하고 어깨동무할 수 있는 감정을 서로에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홍원준 필자는
숭실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평소 사회, 정치, 문화 등에 비판적 의식을 견지해왔습니다.

그래서 의생명시스템학과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꿀 정도로 존재, 사유, 실존, 본래성 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철학도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철학의 인식론을 중심으로 촘스키와 같은 언어철학자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젊은이로서, 우리 사회 진보에 대한 대안제시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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