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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박정환 목사 칼럼

애정남, 대통령의 원칙은 어디까지인가.

by anarchopists 2019. 11.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2/0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원칙 없는 사회

TV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에서 우리에게 애매한 것들을 골라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남자가 있으니 바로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이다. 마트 시식코너에서 몇 개까지 먹어도 될까? 극장에선 오른쪽 팔걸이를 써야 할까, 왼쪽 팔걸이를 써야 할까? 결혼 축의금은 얼마를 내야 할까?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 마지막 남은 음식은 누가 먹어야 할까? 애매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애정남의 등장으로 시청자들은 ‘속이 후련하다’는 반응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애정남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있기 때문이 아닐까? 워낙 우리 사회가 원칙이 없고 ‘애매한 상황’이 많기 때문이리라. 똑같은 죄를 지어도 돈이 없어서 누구는 처벌받고 누구는 돈을 많이 가져서 처벌받지 않는 ‘애매한’ 상황, 남에겐 준칙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은 자신의 편이대로 해석하는 ‘애매한’ 상황, 장애아를 성폭행한 인물이 버젓이 또 다른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애매한’ 상황,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동료 의원에게 최루탄을 날리는 상황에 대한 준칙 적용의 ‘애매한’ 상황 등등. 아직 우리 사회엔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 하지 않는가?

안철수는 《나의 선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매사가 순조롭고 평안할 때는 누구나 원칙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원칙을 원칙이게 만드는 힘은 어려운 상황, 손해를 볼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지키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힘든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켜나간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을 믿는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1869∼1948)는 함석헌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를 화장한 장소이자 추모공원이 야무나 강변에 위치한 ‘라즈 가트(Raj Ghat)’다. 라즈는 ‘주권·지배·통치’라는 뜻이며 가트는 ‘강가와 맞닿아 있는 계단’을 뜻하는 말로서 그 자리에 검은 대리석의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 제단에는 간디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헤이람(라마신이여!)’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또한 라즈 가트 앞의 화강암 벽에는 간디가 1925년 <청년 인도(Young India)>라는 신문매체에 기고한 ‘사회를 병들게 하는 일곱 가지 사회악(Seven Social Sins)’이라는 글을 새겨 넣어 그의 신념을 표현했다.

간디는 국가와 사회를 멍들게 만드는 사회악으로 원칙이 없는 정치와 노동이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덕성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를 들고 있다.  간디는 ‘일곱 가지 사회악’ 중에서 먼저 우려한 것은 ‘원칙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s)’를 지적했다. 바른 사회로 가는 첫걸음은 바른 정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간디의 중요한 사상적 체계였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치는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노동 없는 부(Wealth without work)’에서는 자신의 노동으로 얻은 부만이 신성하고 값진 것이라고 역설했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자가 잘사는 사회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불로소득을 얻은 자들에 의해서 사회는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지적한 ‘양심 없는 쾌락(Pleasure without conscience)’은 가치관의 상실로 인한 부도덕한 쾌락을 뜻한다.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진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아스케제(Askese 단련 또는 훈련)를 통한 자기절제가 쌓인 사회만이 희망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인격 없는 교육 (Knowledge without character)’은 인격향상을 위한 지식에 목적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의 목적이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교권은 끝이 모를 정도로 추락하는 사회,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자들이 양산되는 교육이라면 결국은 그 사회를 병들게 할 것이다.

다섯 번째, ‘도덕 없는 경제(Commerce without morality)’로 이윤추구는 상업의 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도 원칙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돈만 된다면 어떠한 부도덕에도 눈감는 사람들, 오늘의 사회 구성원들로 그렇게 많은 이익을 얻어도 그 사회에 이익을 환원하지 않는 기업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큰 사회악이라는 것이다.

여섯 번째, ‘인간성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에서는 과학은 인류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오히려 과학이 인류에게 해를 끼치는 방향으로 발전하면 큰 죄악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다. 과학은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인류의 복리증진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희생 없는 종교(Worship without sacrifice)’에서는 종교의 역할을 강조했다.
종교는 많은 이들의 살림과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종교가 본래의 역할을 망각하고 오히려 만인 위에 군림하거나 인간을 우매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종교의 존재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해서 인류에 해악을 끼친 종교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인간을 살리고 희망을 주는 종교, 인류에 헌신, 봉사하는 종교가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말로만 공정사회를 향한 외침이 공허함과 애매함으로 마음에 응어리를 만드는 이 때에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원칙 없는 이 사회를 향하여 누가 원칙을 세워 나갈 것인가? 그것은 지금의 우리 씨알들이 할 일이 아닐까? 어렵고 힘들 때 일수록 지켜내야 하는 것이 원칙 아닐까? 간디의 애끓음도 애정남도 필요 없는 공명정대한 사회는 언제쯤 오려는가?(2011.12.2, 박정환)

박정환 목사님은
박정환 목사님은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후, 영남신학대학교와 장신대 신학대학원(목회연구과)을 거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생태영성을 연구하여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지금은 대구가톨릭대학교의 강사이면서 포항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포항바다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바다’라 함은 “바름과 다름”의 합성어다. 박목사님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정보는 cafe.daum.net/seachurch에서 얻을 수 있다.

또한 박목사님은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에서도 활동을 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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