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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토요 시사

아람회재심사건, 무죄판결의 의미

by anarchopists 2020. 1.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5/23 06:36]에 발행한 글입니다.


사법정의, 시회정의, 역사정의를 세웠다.

아람회사건이란
5월 21일 오전 10시 30분,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이성호 부장판사)는 아람회 재심사건 선고공판에서 관련자 전원의 계엄법ㆍ국가보안법ㆍ반공법ㆍ집회시위법 위반 등에 대한 면소 및 무죄 판결을 내렸다.

아람회 사건(1981.7.16 발생)은, ①전두환 집권초기 자생적 빨갱이들이 5.18민주항쟁과 관련하여 반국가단체를 조직하였으며 ②반국가단체 활동을 통하여 국가보안법과 계엄법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그 관련자들이 최고 10년의 중형을 받고 2년 5개월 가량 옥살이를 하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건이다. 이번에 내려진 아람회 재심 판결의 의미를 살펴본다. 이에 앞서 아람회 사건의 실체부터 알아보자.

일제 강도 권력, 박정희 폭도 권력, 전두환 야만 권력이 한반도의 권력을 움켜잡는 시기의 시대 분위기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일제가 한번도의 주권을 강탈할 때는 우리 민족 스스로 근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국가건설의 방향과 국가형태를 둘러싼 담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하여 자주적 노력에 의하여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던 때였다.

그리고 박정희가 권력을 강탈할 때는 한국사회의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각계각층이 살을 깎는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때였다. 또 전두환이 권력을 찬탈할 때는, 오랜 세월 강도권력에 짓밟힌 주권을 되찾기 위한 민주시민의 함성이 드높았던 때였다. 이와 같이 당시의 근대화 노력, 민주화 노력, 시민사회화 노력들이 모두 힘을 가진 야만적 강도들에게 짓밟히고 있던 때였다.

이들 야만적 강도들에게는 그들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된 대표적 사건들이 일제강도 때는 <105인사건>이요, 박정희 강도 때는 <인혁당사건>이요, 전두환 강도 때는 <아람회사건>이다.

일이 일어난 발단을 보자. <아람회사건>에 연류된 사람들은 대부분 각자의 생활 속에서 당시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족의 장래와 이 나라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던 자들이다. 즉 아람회 사람들은 그 당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던 일반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당시 대전지방검찰청 금산지청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현칠(현 54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어느 날 성당 행사 때 <5.18광주학살>에 대한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당 주임신부를 통하여 광주학살 진상에 관한 유인물을 받아들게 된다. "전두환광주살육작전"(전남대 학생회 작성)이라는 유인물이다. 김현칠은 이를 정해숙 선생에게 보였다. 여기서 상의가 되었다. 프린트해서 이를 널리 알려야 한다. 그래서 김현칠은 이 유인물을 이재권이 근무하는 직장에 가서 당시 철판(가리방)에 대고 이를 필사하였다. 그리고 등사판으로 많이 복사하였다. 이것을 아람회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보냈다.(1980. 5.22)

나라 걱정이 '반국가단체' 결성으로 둔갑


그리고 김현칠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광주사태진상" 등 유인물을 가져다 등사하여 아람회사람들에게 주었다.(80.6.20) 이들은 이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배포하였다. 당시 "전두환 광주살육작전"이나 "광주사태진상" 등은 전두환의 권력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아킬레스건이었다. 아람회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에 많은 걱정을 하였다.


당시 황보윤식은 대만으로 유학(9월 학기)을 가기 전에 잠시 대전의 한 고등기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여기서 가난하고 어려운 학생들을 만난다. 하여 이들의 대학진학을 돕기 위해 '검정고시반'을 몇몇 뜻 있는 선생님(신용, 박경옥)들과 함께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황보윤식은 8월이면 학교도 떠나고, 정든 학생들과도 헤어져야 한다. 하여 간단한 송별모임을 계획하였다. 교사·학생, 그리고 아람회 사람들이 모인 '금산 수통리 야유회'다.

이 자리에서 아람회 사람들은 세상 걱정을 하였다. "전두환의 정권 찬탈, 5.18광주학살, 김대중 선생의 앞날, 그리고 미국과 한반도 문제, 남북통일문제, 가난한 사람들 문제" 등등. 으레 당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전혀 국가를 전복할 모략은 없었다.

그런데 학생들 몇몇이 아람회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은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람회 사람들이 전두환을 비판하는 소리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뒤에 수통리야유회에서 들은 말들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만나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아람회 사람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반공교육과 친미적 교육에 찌든 아이들로서는 당연한 사고였다.

단지 "이상하다"는 생각을 뒷날 대전고등학교 교련선생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그 교련선생이 미친 짓거리를 하였다. 그가 아는 경찰에 "이상하다"를 "수상하다, 빨갱이 같다"라고 고쳐 신고를 하였다. 말이 와전되었다. 이를 접수한 내무부 치안본부는 중앙정보부와 청와대와 상의하였다. 이들은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다. 권력유지의 안정에 이용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일'을 '있었던 일'로 조작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른바 '반국가단체' 결성 조작이다.

이래서 아람회 사람들과 수통리 야유회 갔던 사람들, 박해전의 주변 사람들, 황보윤식의 주변 사람들이 1981년 7월 16일부터 시차를 두고 대전지방경찰청의 비밀수사본부인 보문산대공분실로 불법 체포되어 끌려갔다. 대공분실은 연일 아귀의 울부짖음으로 날이 새고 졌다. 아람회 사람들이 고문 받는 소리다. 수사관들은 수사 시나리오(도미다리 공작 Ⅱ)를 미리 작성해 가지고 왔다. 시나리오대로  35일간이라는 엄청난 시간 동안 고문을 통하여  '있지 않은 일'을 '있었던 일'로 조작되었다.(관련기사: <오마이뉴스> 2007년 7월 3일 "빨갱이짓 하다 죽었다고 유서 써라")

전두환의 압제에 의하여 이렇게 조작된 아람회사건은, 계엄법·국가보안법·반공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법 등 위반으로 모두 5심이 진행되었다. 피해자들이 공판에서 장기간의 불법구금과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자백한 것이며, 결코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거나 북한을 찬양·고무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였음에도 대전지법은 임의성 없는 자백에 의존, 증거재판주의를 위반하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서울고법은 반국가단체구성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였으나,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서울고법의 판결을 파기하고, 환송받은 서울고법이 최종적으로 박해전(10년), 황보윤식(7년), 정해숙(5년), 김창근(1년 6월), 김난수(군법회의, 징역 4년)에게 징역형을 내림으로써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사법부의 책무를 저버렸다.(<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이들은 길게 2년 5개월이라는 형을 살고 1983년 12월 23일 전원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였다. 독재정권이 사라지고 좋은 세월이 오자, 이들은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신청하게 되었다.(2004. 4.26) 그리고 민주정권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치되자(기본법 제정, 2005. 5.31) 이곳에 진실규명을 요청하게 되었다.(2006.12.5) 이와 함께 서울고법은 재심 개시를 결정하였다.(2006.7.26) 그리고 2009년 5월 21일, 사건 발생 28년만에 위와 같은 결정이 내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재판부는 "당시 법원이 진실을 외면했다"고 전두환 정권의 끔찍한 용공조작 사실을 밝혀내고, 진실을 외면한 법원의 과오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사법정의, 사회정의, 역사정의를 세웠다

그러면 이제 아람회 재심사건에서 무죄선고의 의미를 살펴보자. 먼저 사법적 의미가 있다. 아람회 사건은 28년 전, 군부권력 하에서 발생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28년 후, 아이러니하게도 그 정권의 계승자인 보수권력 하에서 재심이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상반된 판결이 나왔다는 데 의미가 있다. 즉, 권력의 성격과 무관하게 판결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사법정의를 세웠다.

이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법관에게는 소수자 보호라는 핵심적 과제가 있어 절대 권력자나 힘을 가진 다수가 진실에 반하는 요구를 하더라도 법원은 진실을 말하는 힘 없는 소수의 편이 되어 보호해야 한다"며, "설령 극심한 불이익을 받게 된다고 해도 법관은 진실을 밝히고 반드시 이를 지켜내야만 한다"고 판시하였다.

이는 곧 그 동안 사회일각에서 재판은 정치권의 압력과 유혹에 의하여 판결이 난다는 풍문, 정치성향적 법관·출세지향적 법관 등 현실영합적 법관의 성향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는 풍문을 일거에 잠재우고도 남는 판결이었다. 곧 사법정의를 세운 역사적 판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반 잡범의 경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있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의 아람회재심사건 무죄선고는 이러한 사법부 불신을 한꺼번에 날려주었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게 사법부의 법관이 할 일"이라고 법관의 임무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곧 아람회 재심사건의 무죄선고는 이 시대 용기 있는, 그리고 양심과 정의가 살아 있는 재판관의 판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사회정의를 세웠고 인권주의를 확립하였다.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인권을 유린하는 일체의 고문행위를 비난했다. 재판부는 "전두환 정권을 비난했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이 아람회 사람들을 영장 없이 보안분실에 가둬놓고 일주일 이상 잠재우지 않기, 물고문, 집단구타 등의 가혹행위로 거짓 진술을 받아낸 불법행위를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결하였다. 곧, 고문 등에 의해 인권을 유린해서는 안 된다는 인권주의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판결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공안사건에서는 통상 고문 등이 일어난다고 한다. 당시 아람회 사람들을 고문하였던 수사관들이 재심법정에 나와 증언한 내용이다. 이번 재심법정에서는 고문 등을 통한 거짓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시하였다. 곧 이번 아람회 재심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은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유린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국가폭력에 대한 심판이었다.

셋째, 역사의 심판은 반드시 정의롭다는 사실을 심어주었다. 아람회 사람들도 끈질기게 재심을 통해 무죄를 이끌어냈지만 사법부도 이들의 용기와 인내를 높이 샀다. 아람회 사람들은 그 동안 그들의 수기를 모아서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1997. 5.18)라는 책을 펴낸 일이 있다. 이 제목에서 보듯이 아람회 사람들은 사법부와 정치권에 한을 품고 살았다.

법정에서 재판장의 45분간 판결문을 읽어나가는 동안 이들은 소리를 죽여가며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28년만에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이들의 눈물은 곧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에서 "역사의 심판이 끝났다"로 바뀌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렇게 이번의 아람회재심사건의 무죄 판결은 역사의 심판은 늘 정의롭게 내려진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킨 역사적 심판이었다. (황보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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