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토요 시사

[김승국] 대한민국, 중립화 통일의 길로 가자

by anarchopists 2020. 1.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3/13 05:35]에 발행한 글입니다.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1)

1. 중립의 의미

‘중립(中立)’의 뜻풀이는 이렇다; ① 어느 편에도 치우침이 없이 그 중간에 서는 일. 양자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아니함. 중정(中正)독립. ② 곧아 한쪽으로 기울지 아니함. ③ 어느 쪽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적대하지 않음 ④ 교전하는 나라(교전국)의 어느 쪽도 편들지 아니함. 교전국 쌍방에 대하여 공평하며, 원조를 하지 않음. ⑤ 국제법상 국가 간의 분쟁ㆍ전쟁에 관여하지 않음. 어떠한 군사동맹에도 참가하지 않음.

개인ㆍ국가 간의 중립을 지키려면 위와 같은 상태를 유지해야한다. 그런데 어느 편에도 치우침이 없이 중간에 서는 ‘엄정중립’의 삶의 태도를 지키기 어렵다. 중립적인 인생살이가 수월하지 않은 것은 이기적인 심성 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어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쪽을 선호한다. 이해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일수록 상대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적대하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별하거나 배제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중심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익숙하며, 이렇게 하는 가운데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경우가 생긴다.

개인의 삶이 이러할 진데 국가의 경우는 훨씬 어려워진다. 이웃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엄정중립의 외교노선만 고집하다가 전쟁의 불똥이 자국(자기 나라)로 튀면 어쩔 셈인가? 전쟁의 불길이 자국에 옮겨오기 전에 동맹관계를 만들거나 기존의 동맹관계에 편입되어야 국가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중립국이 되어 어느 쪽에도 편들지 않고, 전쟁에 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일체 피하는 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큰 나라에 빌붙어 동맹관계에 안주하는 게 유리한가? 중립국이 되는 게 좋은가?

이웃 나라에서 전쟁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영토 안에서 전쟁이나 분쟁이 발생했을 때 뒷짐 지고 앉아서 “우리는 엄정중립을 지킬 터이니 썩 물러나시오!”라고 말하면 상대 국가가 그 말을 들을까? 제2차 대전 때, 중립정책을 취하고 있던 네덜란드ㆍ룩셈부르크가 히틀러 군대에 유린된 사례가 재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국제적으로 받을 수 있을까?

개인 간의 관계 속에서도 중립의 지대를 발견하기 어려운데 국가 간의 관계 속에서 중립지대를 조성할 때 더욱 큰 난관이 닥쳐온다. 남(타국)의 손해가 나(자국)의 이익이 되는 제로섬(zero sum) 사회(국제사회)는, 중립지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천하무인(天下無人; 천하에 남이란 없다)’의 묵자(墨子)의 말씀에 따라 개인 간의 중립지대를 애써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게 쉬운 일인가? 개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천하무인의 중립지대를 만들 수 있겠지만, 국익의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국제사회에서 중립지대는 어쩌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특히 한반도의 주변처럼 강대국들이 전갈과 같이 우글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중립화ㆍ중립지대ㆍ영세중립을 이야기하면 매국노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동맹의 가치가 영세중립 보다 성(聖)스러운 이 땅에서 중립을 섣불리 이야기하다가 뺨맞기 안성맞춤이다. 현실정치(Real Politics)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한국도 스위스ㆍ오스트리아ㆍ코스타리카와 같은 중립국가가 되어야한다’고 설파할수록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핀잔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중립국가로 되고 한반도가 중립지대로 되는 게 이상적인 꿈에 불과할까?

중립화 논의에 이상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지만 환상은 아닌 듯하다.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스위스ㆍ오스트리아ㆍ코스타리카 사람들처럼, 우리나라(한국)를 중립국가로 만들거나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엄중한 현실 속에서 엄중중립을 지키라는 주문(注文)이, 평화통일의 주문(呪文)으로 승격될 날이 도래할 수도 있다. 강대국을 향하여 “우리들(우리 민족)이 스위스ㆍ오스트리아ㆍ코스타리카와 같은 중립정책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이룰 테니 더 이상 간섭하지 말고 한반도의 중립지대화 방안에 동의하시오”라고 주문(注文)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반도 중립통일의 주문(呪文)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의 중립지대화에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국가ㆍ단체ㆍ개인을 향하여 중립의 주문서(注文書)를 발행하는 일부터 시작해볼까? 여기에서 우리들(우리 민족)이 서로 협의하여 주문서의 내용을 작성하는 게 중요하다. 어떠한 내용을 넣어서 주문서를 한반도 주변 강대국에 보내야, 흔쾌하게 ‘중립’이라는 새 상품을 납품할 수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주문서를 정확하게 작성하려면, 먼저 스위스ㆍ오스트리아ㆍ코스타리카의 중립화 성공사례를 정확하게 학습해야하며, 이들 국가의 중립화 성공사례를 한반도에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을 새로 개발하여 강대국들에게 내려먹여야 한다. 스위스ㆍ오스트리아ㆍ코스타리카처럼 중립화의 토양이 비옥하지 않은 한반도 주변의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중립지대라는 새로운 가치가 유행이 되도록 하려면, 중립의 가치를 드높이는 사상적인 기반을 만들어야한다. 사상적인 토대 없는 모델은 모래성이 될 우려가 크기 때문에, 중립과 관련된 사상적인 탐색을 먼저 진행한다.

필자는 이러한 사상적 탐색을 하기 위해, 춘추전국 시대의 선현들의 말씀 속에서 중립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한다. 한반도의 현상 못지않게 복잡했던 춘추전국 시대의 난국을 평화로운 상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맹자(孟子)가 ‘중용(中庸)’을 주창했으며, 묵자(墨子)가 국가 간 전쟁을 중재하기 위해 진력하면서 ‘중(中; 中立의 中)―시중(時中)’의 가치를 중요시한 사상적인 맥락부터 드러낸다. ‘中立’이라는 한자의 핵심단어인 ‘中’의 의미를 밝히면서 ‘時中’으로 지평을 넓힌다.

2. 中立의 ‘中’

아마 중국인들처럼 ‘中’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모난 것, 사각형, 뾰족한 것을 기피하고 모나지 않는 것, 둥근 것, 원형, 둥글둥글한 것을 좋아한다. ‘中’의 자원(字源; 문자가 구성된 근원)은, <어떤 것을 하나의 선(線)으로 꿰뚫어 ‘속ㆍ안’의 뜻을 나타냄. 갑골문(甲骨文)ㆍ금문(金文)에서는 특히 군대의 중앙에 세운 깃발 모양으로, ‘속’의 뜻을 보임. ‘맞다, 맞히다’의 뜻일 때에는, 속으로 들어가는 뜻을 나타냄>이다. 한자 사전의 ‘中’을 찾아 자원(字源)을 찾으면, ‘中’자가 갑골문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천한 그림을 볼 수 있다. 둥근 원의 한가운데를 엄정중립의 선(線)이 지나가는 상형문자가 ‘中’자이다. 모나지 않는 원만한 세상 속의 중립지대를 상징하는 ‘中’자는 중립화의 상징적인 단어이다. 모나지 않는 원만한 국제관계 속의 중립지대를 상상하는 게 중립화 구상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주변의 원만한 국제관계 속에서 한반도의 중립화(중립을 가다듬어냄)가 성공할 수 있으며, 그러한 국제관계의 중앙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야 중립화를 제대로 이룰 수 있다. 중립화를 위한 중앙 지점을 찾으려면 ‘시중(時中)의 관점’이 필요하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中’의 가치는 중국의 거의 모든 고전에 들어 있다. 그 중에서 중국 고전의 원전인『주역(周易)』에 ‘中-時中’의 사상이 넘쳐난다;『주역』「계사전(繫辭傳) 下, 9장에 “6효가 서로 섞이는 것은(六爻相雜) 오직 그 때나 사물에 따른다(唯其時物也)”라는 구절이 있다.『주역』의 각 괘(卦)는 매순간 그 때마다 직면하는 전체적인 상황을 나타내고, 그 괘의 각 효(爻)는 행위자들의 그 때 거기에서의 위치를 동시에 하나로서 나타내준다. 『주역』에서 말하는 ‘시물(時物)’이란 ‘바로 그 때 동시에 거기에서 하나의 전체로서 드러나는 물[物; 사태] 자체, 존재’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물(時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실천이 바로 ‘시중(時中)’인 것이다.(김재범『주역 사회학』86~87쪽)

이처럼『주역』의 ‘時中’에 나타나는 ‘中’의 세계관에 따라, 한반도 주변의 時物(사태ㆍ정세)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매순간마다 중립의 가치를 확립하면서 한반도의 중립지대화를 지향하는 게 바람직하다.『주역』의 세계관이 반영된 태극기의 둥근 원 속의 음양이 ‘中-時中’의 조화를 이루어 통일된 세계를 지향하듯이, 한반도 주변국의 조화를 도모하면서도 ‘중용(中)의 길(中道)’를 걷는 중립화 통일을 이룩하면 좋을 것 같다.
---------
* 위의 글은, 『책과 인생』2010년 3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김승국)

김승국(金承國) 평화운동가는
■ 숭실대에서 철학박사학위을 취득(1995)한 후,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낸 바 있다. 사회경력으로는 “한겨레신문” 기자와 월간 “말”지 편집국장을 거쳐 지금은 인터넷신문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발행인으로 있다. 이외 영세중립통일협의회 이사로 활동하는 등 평화활동가이다. 지금은 한일 100년 평화시민네트워크 운영위원, 평화헌법시민연대(한국 9조의 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핵문제‧ 핵인식론》(1991), 3. 오만한 나라 미국》( 2002),《한반도의 평화와 북한 핵문제》(2007)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맑스‧ 엥겔스의 종교론》(마르크스‧ 엥겔스 지음, 1988)가 있다. 그 외 <한반도의 평화 로드맵>(2005) 등 세계평화와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