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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속도에 굶주림과 속도의 무의미

by anarchopists 2019. 11. 1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5/2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속도에 굶주림과 속도의 무의미



  빠름 혹은 빠르기의 정도에 익숙해져 버린 시대다. 빠름은 단순히 느림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삶의 기계화가 되어가는 근대적 산물이다. 빠르지 않으면 안 되는 조급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심리는 본능이라 하기에는 기계적, 문명적 습관에 많이 젖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욕구가 본능적으로 혹은 이성적 빠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욕구를 넘어 욕망이 기계적 빠름에 순응한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빠른 것을 좋아한다. 빠름은 속도에 밀려 이성마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끊임없이 무장해제를 하고 자기를 놓아 버린다. 빠름은 기계적 현상이자 인위적, 조작적 시스템이다. 더 나아가 빠름은 경제적 가치이다. 빠름은 심리적 만족감과 노동의 효율성이다. 빠름은 학습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데 중요한 척도가 된다.


  빠름은 올바르냐 도덕적이냐 배려냐 하는 것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때와 때 사이, 즉 시간의 틈 사이를 어떻게 하면 공백이 없게 할 것이냐에만 관심을 갖는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때는 쉼, 짬, 느림이 있는 시간의 완성이나 시간의 충만은 필요 없다. 오로지 때와 때를 멈춤이 없이 지속적으로 메우고 활동해서 경제적 삶의 이윤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간(자기만의 때)도 빠름이라는 문명적 구조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다. 빠름을 유지시키고 빠름을 만들어내기 위해 환경적, 생명적, 관계적 손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를 생각해 보라. 빠름이 좋다 하지만 그 빠름을 추구하는 욕망 때문에 한쪽에서는 느리게 살 권리, 생명과 함께 할 권리를 빼앗긴다. 그래서 빠름은 한편 잠정적 긍정이지만, 다른 한편 영원한 부정이다. 빠름은 긍정을 요구하지만 그 긍정은 단순한 긍정이 아니라 계속되는, 강요되는 순응적인 긍정이 된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느림 혹은 생리적, 인간적 시간은 그 빠름의 시간 속에 영원히 묻혀 버리고 만다.


  빠름은 우리의 몸시간이 아니다. 인간은 몸이라는 제한된 실체를 가지고 있다. 몸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정신은 지금껏 계속되어 왔고, 그 형이상학적 실체가 정신임을 확인하였지만 몸을 떠나서 실현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유한한 몸, 한계가 있는 몸은 신체적 구조를 통해 세계와 조우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의식을 발현하였다. 거기에는 움직임, 즉 운동의 동적 상황에서조차도 자신의 몸세계를 떠나서, 혹은 벗어나서 이루어질 수 없는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세계와 자연스럽게 만나는 인격체로 삼으려 하기보다 몸을 기계화한다거나 몸을 대신 할 기계나 매체로 몸 자체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재편성하려고 한다.


  지난번 삼성전자에서는 그래핀을 이용해서 빠른 데이터 처리를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차세대 반도체 시장에 대해 밝게 전망했다. 그래핀(graphene) 반도체는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복잡한 계산작업을 할 때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순식간에 데이터 처리를 가능하게 해준다. 또한 한국철도기술연구원에서는 국내 개발로 시속 430km의 차세대 고속열차 해무를 선보였다. 이른바 속도 경쟁에서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보도를 접할 때마다 속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함께, 속도에 대해 집착하는 인간에 대해 사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갈수록 점점 빠름을 선호하면서 그 빠름을 선(善)하다고 하는 인간의 인식은 어떤 때[시간]와 자리[장소]에 머물지 않고 주시하지 않음, 주의 깊게 보지 않음, 눈여겨보지 않음, 생각을 두지 않음이다. 둘러-있음의-세계(Um-welt)에 관심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속도는 우리를 끌고-감이요, 위험이자 들이닥침이다. 끌어오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다. 그로 인해 몸은 빠름의 도구에 의해 더 빠름을 요청한다. 몸은 바빠지며, 삶은 시간에 의해 조각나고, 생활세계는 가벼움에 빠진다. 삶을 효율성, 경제성으로만 평가, 인식하는 세계가 될 때 삶은 깊이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수치화, 계량화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빠름이 다급함, 조급함, 황급함으로 치닫게 되어 삶이 경황없음으로 추락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시간이 때와 때 사이를 의미하는 것은 삶의 속도와 빠름을 조절하는 걸침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상실할 때 삶의 일정한 때, 중요한 때, 쉬어야 할 때, 가족과 함께 할 때, 내 안을 성찰할 때를 영원히 갖지 못할 것이다. 모든 때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해버리는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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