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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몸적 주체성의 회복

by anarchopists 2019. 11. 1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6/01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몸적 주체성의 회복



몸은 인간의 존재 양식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몸이야말로 세계 내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외현적인 사실을 의미한다. 몸은 세계에 나타남이다. 그래서 몸은 어떠한 억압과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다. 자신의 몸은 곧 주체다. 자기에게 자기로써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주체로서 나타나 있다. 몸을 타자화시킬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몸이 타자와 만나고 세계 안에 있다고 해서 몸의 주체적 경험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할 수 없다. 만남에는 나라는 몸적 주체가 만남 자체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에, 타자를 구속하고 억압할 경우 진정한 만남은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주체의 몸적 경험을 말살하는 것이고 몸적 경험의 시공간을 빼앗는 것이다. 몸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인간 개별자가 직접성을 표현하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몸적 주체가 갖는 경험과 경험하는 시공간의 특수한 맥락 때문이다.


  몸은 결코 사물화될 수가 없다. 몸은 누구에게나 신성함과 순수함의 상징이다. 그러한 몸이 경험하는 것은 기억이며 흔적이다. 몸의 살은 기쁨, 슬픔, 노여움, 즐거움, 상처, 고통, 증오 등의 삶의 총체적 감정․기분․정서를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 경험, 성적 경험은 자발적 행위나 능동적 행위를 통한 자기 존재의 확장과 확인, 그리고 사회적 교류가 아닌 수동적, 강제적 행위라면 기억의 장소로서의 몸의 경험은 억압당하고 말 것이다. 더군다나 가브리엘 마르셀(G. Marcel)이 말한 것처럼, “나는 나의 육체”라고 말할 수 있는 몸적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몸이 타자화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나의 육체”라는 현상학적 선언은, 몸의 근원적 관계 혹은 자리를 말함으로써 자기 아닌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다.


  나아가 몸이 타자화, 사물화될 수 없다는 것은 몸의 정치화에 대한 거부를 포함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몸이 타자화, 사유화될 수 없다는 몸적 주체성의 보다 강력한 발언이다. 개별자를 몸으로 볼 수 있지만, 그것
은 단순한 몸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은 몸뚱이, 즉 사회 공동체나 국가 공동체를 대변하는 민족적 신체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 말은 몸이 단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소유와 사용가능성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몸은 민족적 신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때로는 전쟁의 희생물, 종교적 희생물, 의학적 희생물 등으로 전추(顚墜)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민족적 신체성으로 몸은 굴욕적으로 타자들에 짓밟히면서 유린당하는 성욕적 희생물, 노동의 희생물이 될 수가 있다.


  이렇듯 개별적인 몸적 주체성은 거대한 민족적 신체성에 종속되어 자신의 몸적 주체성을 주장하지 못함으로써 몸의 필연적 해방을 지향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몸적 주체성을 구속하고 억압할 권리는 없다. 몸이 갖고 있는 사밀하고 내밀한 역사를 전체주의로 환원하면서 정치적 수단의 몸으로 전락하는 것은 몸을 통한 인간다운 인간을 역행하는 것이다.


  이념의 희생물이 되거나 성적 희생물이 된다 하더라도 몸은 세계를 정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염시킨다. 이념은 정신을, 성은 몸을, 노동은 세계를 정결하게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사유화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말짓과 몸짓이다. 과거 이런 정결(의식)을 오염으로 만들어버린 국가가 있다. 일본이다. 지난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선조들은 성과 노동의 경험에서 몸적 주체성을 빼앗기고 타자화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을 치면서 희생물로서의 몸이 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결국 민족적 신체성은 점령을 당하고 말았다. 몸적 주체성이 강탈당한 결과는 역사적 시공간 안에서 몸과 정신의 보상을 외치는 뼈아픈 현실의 경험이다. 오늘날 과거 일제강점기 때에 성노예(위안부; 근로정신대)로 자신의 몸적 주체성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강제 징용피해자로 일본 기업(미쓰비시와 신일본제철)에 몸적 주체성이 종속되었던 분들이, 그들을 상대로 손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나의 몸이 있다. 나의 몸이 존재한다는 발언은 세계와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몸이 세계를 지향하는 주체성의 언표이다. 그것은 세계의 기저(基底)인 기체(주체, subjectum)가 몸적 사고를 통해 세계를 구성하고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와 만나고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은 몸이 사유를 통해 세계에서 자기 자리의 위치를 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질곡에도 불구하고 몸에 대한 인식과 상처를 다독이는 행위는 몸이 세계를 해석하고 자신의 시공간을 새롭게 확보하겠다는 의지로 봐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몸이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과 자기 주체적 외현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하는 시점에 있는 듯하다. 그 이유는 몸적 주체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현재에 경험한 몸의 기억들을 애써 치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SBS & SBS콘텐츠허브).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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