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6/08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따라서 삶의 지향과 방향성 등의 목적성은 ‘어떤 것’(something)에 대한 인식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가 관건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사물성, 물질성, 유한성, 가변성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정신성, 무한성, 불변성으로 할 것이냐이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이 처해 있음의 실존에 변화가 생기며 삶의 초월이 발생한다. 물론 ‘어떤 것’은 느닷없이 다가온다. 인간의 관심 대상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늘 앞에 나타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각, 지각, 지성이 사태를 파악하기에 앞서 나타난다. 그것은 가끔 나타남이 아니라 매순간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등장한다. 그런 경우 그 어떤 것에 대한 인식과 판단을 종합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관심의 대상으로 ‘향함’은 끌려간다. 의식이 빼앗긴 채 끌려간다.
그러기 전에 인간은 관심의 대상에 대한 선이해, 선판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신성, 무한성, 불변성의 범주적 삶, 아프리오리한 삶의 철학을 확고하게 갖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처해 있음, 빠져 있음으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삶의 구렁텅이 속에 존재하고 말 것이다. 흐느적거리고, 흐리멍덩한 쾌락적인 삶은 이미 어떤 대상, 사물성에 이끌려 향해 있음의 실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떤-것’(some-thing)에 대해 자각했다는 것은 동시에 향해-가고-있음(being-toward)을 의미한다. 사태에 대해서 인식, 지각, 감각함으로써 이미 끌려-가고-있고, 이미 빠져-가고-있다는 것이다. 끌려-가고-있음과 빠져-가고-있음이라는 인간의 수동적 행위에 대한 언술과는 반대로 끌고-가고-있음, 곁에-가고-있음, 혹은 함께-가고-있음이라는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일, 사건, 사물에서 불변, 무한, 정신, 초월이라는 생의 범주로의 이행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관심 대상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그 자체로부터 자유를 획득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향해-감은 있음이라는 존재의 실존을 규정하고 확정하는 과정이다. 한국 사회의 주말이나 밤의 모습은 ‘어떤-것’으로 향해-가는 인간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주말이면 만취 사회가 되는 도시, 주폭으로 변하는 밤문화, 이성은 혼미해져서 비틀거리는 사회, 유흥가와 환락가로 넘쳐나는 대학가. 이 모든 것은 하루 술 소비량 맥주 952만 7397병, 소주 896만 5068병, 하루 술 먹는 사람이 598만 7061명이라는 통계가 ‘어떤-것’으로 향해-감의 상태를 잘 말해준다. 자기 존재의 확인, 변화하는 사건 속에 자기 자신을 맡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몰입,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감, 욕망을 수동적으로 재생산해 감.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사회의 음주 문화를 대변하는 말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것, 대상성, 물질성을 향하는 존재, 향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주는 충분한 지표가 된다고 본다. 인간 존재는 이미 처해 있음의 상황에 직면에 있는 것이다. 인간 안에서 부르는 존재의 목소리로 향하기보다 인간 바깥의 변하는 사물, 대상, 조건에 자신의 존재를 맡기고 그리고 향하는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인간 고유의 존재로 서 있음, 존재로 살아감을 포기하고 스스로 대상으로 전락하는 삶을 자초하고 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말한다. “그 어떤 인간이든 간에 모두가, 자기 이상의 존재인 것이다... 어떤 사람도 완전히 그 자신이 된 선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자기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을 신뢰한다면, 인간은 홀로-있음, 이야기-함, 배려(돌봄), 이성, 자기 성찰, 전체를 바라봄이라는 존재론적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스포츠 조선/아시아 투데이/강원도민일보).
자기 자신이 된 적이 없는 사람들
인간은 하나 혹은 다양한 대상을-향해-있음(being-toward-something)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대상이란 어떤 것, 어떤 사물, 어떤 사건, 어떤 일 등 인간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인간은 관심의 대상이나 사건으로 인해서 이미 마음에 두고 있고, 이미 몸이 가 있으며, 이미 영혼이 빼앗긴 상태가 된다. 그로 인해서 인간 실존의 자리인 있음은 던져져 있음, 무방비 상태로 처해 있음이 된다. 관심 대상과 있음의 거리는 멀 수도 있고, 가까울 수도 있다. 단 ‘향함’(toward)이라는 지향, 방향성, 목적성, 추구함, 갈망함, 욕망함 등을 통한 감각, 지각, 그리고 지성의 작용이 어떠한 상황, 조건,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삶의 지향과 방향성 등의 목적성은 ‘어떤 것’(something)에 대한 인식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가 관건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사물성, 물질성, 유한성, 가변성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정신성, 무한성, 불변성으로 할 것이냐이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이 처해 있음의 실존에 변화가 생기며 삶의 초월이 발생한다. 물론 ‘어떤 것’은 느닷없이 다가온다. 인간의 관심 대상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늘 앞에 나타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각, 지각, 지성이 사태를 파악하기에 앞서 나타난다. 그것은 가끔 나타남이 아니라 매순간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등장한다. 그런 경우 그 어떤 것에 대한 인식과 판단을 종합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관심의 대상으로 ‘향함’은 끌려간다. 의식이 빼앗긴 채 끌려간다.
그러기 전에 인간은 관심의 대상에 대한 선이해, 선판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신성, 무한성, 불변성의 범주적 삶, 아프리오리한 삶의 철학을 확고하게 갖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처해 있음, 빠져 있음으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삶의 구렁텅이 속에 존재하고 말 것이다. 흐느적거리고, 흐리멍덩한 쾌락적인 삶은 이미 어떤 대상, 사물성에 이끌려 향해 있음의 실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떤-것’(some-thing)에 대해 자각했다는 것은 동시에 향해-가고-있음(being-toward)을 의미한다. 사태에 대해서 인식, 지각, 감각함으로써 이미 끌려-가고-있고, 이미 빠져-가고-있다는 것이다. 끌려-가고-있음과 빠져-가고-있음이라는 인간의 수동적 행위에 대한 언술과는 반대로 끌고-가고-있음, 곁에-가고-있음, 혹은 함께-가고-있음이라는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일, 사건, 사물에서 불변, 무한, 정신, 초월이라는 생의 범주로의 이행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관심 대상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그 자체로부터 자유를 획득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향해-감은 있음이라는 존재의 실존을 규정하고 확정하는 과정이다. 한국 사회의 주말이나 밤의 모습은 ‘어떤-것’으로 향해-가는 인간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주말이면 만취 사회가 되는 도시, 주폭으로 변하는 밤문화, 이성은 혼미해져서 비틀거리는 사회, 유흥가와 환락가로 넘쳐나는 대학가. 이 모든 것은 하루 술 소비량 맥주 952만 7397병, 소주 896만 5068병, 하루 술 먹는 사람이 598만 7061명이라는 통계가 ‘어떤-것’으로 향해-감의 상태를 잘 말해준다. 자기 존재의 확인, 변화하는 사건 속에 자기 자신을 맡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몰입,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감, 욕망을 수동적으로 재생산해 감.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사회의 음주 문화를 대변하는 말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것, 대상성, 물질성을 향하는 존재, 향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주는 충분한 지표가 된다고 본다. 인간 존재는 이미 처해 있음의 상황에 직면에 있는 것이다. 인간 안에서 부르는 존재의 목소리로 향하기보다 인간 바깥의 변하는 사물, 대상, 조건에 자신의 존재를 맡기고 그리고 향하는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인간 고유의 존재로 서 있음, 존재로 살아감을 포기하고 스스로 대상으로 전락하는 삶을 자초하고 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말한다. “그 어떤 인간이든 간에 모두가, 자기 이상의 존재인 것이다... 어떤 사람도 완전히 그 자신이 된 선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자기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을 신뢰한다면, 인간은 홀로-있음, 이야기-함, 배려(돌봄), 이성, 자기 성찰, 전체를 바라봄이라는 존재론적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스포츠 조선/아시아 투데이/강원도민일보).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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