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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설 명절증후군 왜 있나?

by anarchopists 2019. 11.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1/22 08:33]에 발행한 글입니다.


설 명절증후군이 왜 있을까?

오늘은 필진 한 분이 바쁘셔서 글을 보내오지 않아, 설 명절과 관련하여 제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합니다. 제 3인칭으로 올립니다.

윤식은 나이 60 중반인데, 양가(兩家) 부모님들이 모두 살아계신다. 남들이 우수게 소리로 아직도 가정의 구조조절이 안 되었다고 한다. 윤식의 부모님은 대전의 노인 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처(윤식은 늘 최 여사라 부른다) 부모(윤식은 장인 장모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는 소백산 자락에 살고 계신다. 최 여사의 아버님은 50대 중반에 심장병으로 서울대 병원으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았었다.

그즈음 윤식은 최 여사와 결혼 전이었다. 최 여사를 통하여 소백산 어느 중과 인연이 되어 이곳 소백산 석륜암 밑 태봉 근처에 1정보의 땅을 사게 되었다. 최 여사 아버님은 의사의 권고도 있고 하여 윤식의 땅을 관리할 겸 소백산 끝자락의 죽계구곡이 흐르는 배점리(이화동천)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얼마 후 동네에서 더 올라간 죽계구곡의 8곡 근처에다 사과과수원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죽계구곡이 흐르는 이곳이 워낙 공기와 물이 좋아 그런지 최 여사 아버님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 계신다.

한 11년 전 일이다. 최 여사 아버님이 나이(지금 나이 88세)가 들면서 농사(사과)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바람에 최 여사는 부모님이 걱정이 되고 땅도 관리할 겸 소백산에 들어와 노인들을 모시고 농사(과수원 이름이 취래원이다)를 짓고 있다. 그 덕에 윤식은 10여 년 동안 3도 4촌(三都四村)의 이중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지금은 아예 대학 강단을 떠나 이곳 취래원에 들어와 최 여사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고 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명절 때만 되면, 윤식의 자식들이 소백산 취래원으로 온다. 옛날의 예절로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윤식이 제 부모를 찾아 대전으로 가야하고 자식들도 대전으로 내려와야 한다.

윤식은 결혼할 여성을 찾을 때, 애정보다는 목적의식적인 결혼을 하였다. 평소 제 어머니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윤식 어머니는 병이 든 까닭도 있었겠지만, 자식에 대한 배려보다는 당신 자신에 대한 배려가 더 강한 여자였다. 그 덕분에 자식들이 제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지금은 나이가 들고 말았다. 윤식만 일찍이 역사 선생을 하여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결국 그 길을 갔지만...

그래서 그런지 윤식은 결혼의 상대를 고를 때, “내 자식에게 훌륭한 어머니를 만나게 해 줘야 한다.” 일념으로 여자를 골랐다. 그 당시 윤식은 공군 장교로 복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관학교 교수가 되기 위해 고려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여기서 자기 자식에게 훌륭한 어머니가 되어줄 최 여사를 만났다. 많은 시도 끝에 사귀게 되었고 파란만장한 일들을 뒤로 하고 결혼 하였다.

결혼 후에 처음부터 윤식은 우리 사회의 전통적 사회윤리에서 일탈하였다.

가족에 대한 호칭에 대하여 나름대로 정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친가(親家)와 외가(外家)라는 개념을 버리게 했다. 윤식의 부모님은 대전에 계시니, 아이들한테 대전 할아버지 할머니, 최 여사의 부모님은 시골에 살고 계시니 시골할아버지 할머니 하게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윤식의 아이들은 친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할머니라고 하지 않는다.

가사분담을 최고의 가치로 만들었다. 여자가 식사를 준비하였으면, 남자는 설거지를 하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날이 껏 최 여사가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식사를 준비하면 윤식은 밥을 먹고 난 뒤 늘 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여자가 빨래를 하면, 남자는 집안 청소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최 여사가 빨래를 담당하고, 윤식은 늘 화장실 청소와 방청소, 그리고 일체 집안의 청소를 해 오고 있다.

가정경제도 사회적인 통념을 버렸다. 결혼 한 날로부터 일체 수입은 최 여사가 관리한다. 윤식은 자신의 수입이 얼마인지 잘 모를 때가 있다. 그리고 얼마를 지출하고 얼마가 남았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윤식은 외출할 때, 최 여사가 주는 용돈과 카드로 쓰면 된다. 게다가 최 여사는 윤식이 밖에서 얼마를 쓰든 일체 따지고 묻지를 않는다. 그리고 지출에 대한 일체의 통제를 가하지를 않는다.

이러한 가정윤리를 배우고 자란 탓인지, 지금 윤식의 아이들도 집안일을 아들들이 한다. 딸도 남편이 집안일을 거의 한다. 딸은 남편네 집에 잠시 들렸다. 이내 소백산으로 온다. 그리고 아들도 설 아침에 부지런히 제 아내 집으로 향한다.

설 명절 때, 윤식의 아이들은 명절증후군이 없다. 먹고 남은 그릇 설거지는 윤식이 맡아서 한다. 윤식 내외는 자식들 집에 가서도 자기네들이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까지 해주고 온다. 남자와 여자가 일의 구분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냥 느끼고 본 사람이 하면 된다. 여자는 힘이 약하니 힘든 일을 남자가 하면 되고, 여자는 섬세하니 세세한 일은 여자가 하면 된다.

사회만 상호부조(相互扶助)가 있는 게 아니다. 가정에서부터 상호부조를 하고 그것을 사회 전체로 확대하면, 인류는 평화로워진다. 평화가 따로 있나. 집안에 평화로우면 그게 평화지. 굳이 남편 집에 가지 않으려 아내가 설날 당일 당직을 설 필요는 없다. (2012. 1.22,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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