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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서민이란 누구인가-현대판 노예?

by anarchopists 2019. 11.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4/27 06:49]에 발행한 글입니다.


서민(庶民)이란 누구인가- 현대판 노예?

자연과 인간의 역사는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시간에 따라 살아온 방식이 다르다. 이것을 시대(時代)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역사시간에는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유럽역사학에서는 삼시대법(Three Age System)을 쓴다. 이에 따르면, 고대(옛날) 노예제사회, 중세(옛날과 오늘날의 중간시대) 봉건제사회, 근대(오늘날과 가까운) 자본제사회라고 한다. 이 자본제사회가 현대(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한국도 대체로 이와 같은 시대구분법을 따르고 있지만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때문에 한국사는 시대구분을 따로 한다. 한국사의 경우는 중국사처럼 왕조(지배권력)에 의한 시대구분을 쓰고 있다. 그래서 한국사를 고조선시대-삼국시대(가야를 포함하여 사국시대)-남북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배층 중심의 시대구분법은 맞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사 시대구분에 대하여 여러 학자들이 각자의 생각을 펴고 있는 형편이다. 어찌했던 고대는 노예제사회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예를 들면, 고조선의 8조금법과 부여의 4조금법이다. 이 두 법에 의하면 노예가 존재하였다. 노예는 가난에서 생기고 전쟁으로 생겼다. 다시 말하면, ‘힘없음과 돈없음’에서 노예계급으로 전락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노예제도가 나쁘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식이 쌓이면서 18세기에 산업혁명으로 자본제 사회를 낳으면서 선진 자본주의 사회인 영국에서 노예제폐지운동이 시작되어 약 100년에 걸쳐(1783경~1888) 일어난다. 그 결과 유럽의 경우, 교황 레오 13세가 〈노동자헌장〉을 반포하게 되고 이의 영향으로 1840년대 ~ 1850년대에 대부분 노예 제도를 없앴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는 1865년(12. 18)에 헌법상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한다. 한국의 경우는 1895년에 폐지된다. 이어 국제연합에서도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하고 “노예제에서 해방되는 것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인권”이라고 선포하였다.(12. 20) 그리고 마지막 노예제 국가였던 아프리카의 모리타니가 노예제의 종식을 선언함으로서(1980. 7. 5) 지구상에서 노예제가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나 노예해방의 이면에는 권력자(정치와 자본, 그리고 종교)들의 정직하지 못한 음모가 숨어있다. 현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공장노동력과 십일조(什一租)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인간해방의 목적이 아니었다. 여기서 인간사회의 모든 타락이 일어나게 되었다.

해방된 노예들은 참사람으로서 살아온 역사시간이 짧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의 출발점이 다르다. 사다리법칙이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종교권력은 이미 사다리의 윗부분에 올라가 있다. 이제 겨우 해방된 노예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는 격이다. 해방된 가난한 노예들이 노예상태였을 때는 주인에 종속되어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여야 해야 한다. 때문에 돈을 벌어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을 가진 자본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노동자(농업과 산업)가 발생하게 되었다. 정치하는 사람들과 자본가들은 이들 노동자를 얄궂게도 노예 대신 서민(庶民)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는 농민이 서민이었다. 농민은 왕족, 귀족, 관리, 천민, 노예를 제외한 그 중간에 살면서 국가에 조세의무와 병역의무를 가지고 있는 신분이었다. 곧 국가에 대한 의무만 가지고 있었지, 정치적으로 아무런 권리가 없는 정치적 계급이 서민이었다. 그러다가 근대사회에 들어와 사민평등(四民平等)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다. 우리나라의 사회성분을 보면, 계급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새로운 사회신분이 형성되었다. 정치적 힘과 자본적 힘을 가지고 있는 권력계층은 상층신분이고, 그러한 권력계층과 연계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도모하는 중간신분이다. 이 중간신분 아래에 서민신분이 있다. 서민신분은 국가와 사회적 혜택에서 멀리 있으면서 조세와 병역의무를 독판 부담해야 하는 최대한 수탈대상자이다. 바로 사회적 소외계급이다. 이들 서민의 조상은 소급해 올라가면 대체로 해방된 노예출신이 많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서민들의 생활모습을 보자. 이들 서민은 전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막 뛰어 내려가는 자들이다. 전철 안에서는 자리에 앉아 편히 가기 위해 내 앞의 손님이 언제 일어날까 그것만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자리가 나면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서둘러 재빨리 자리에 앉는 자들이다. 신문 살 돈을 아끼기 위해 노컷뉴스, AM7 , Metro, Focus를 보는 자들이다. 내 집 살돈이 없어서 강남 아파트는 쳐다보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고급요정과 롬 살롱에 갈 수 없어서 노래방과 소주방을 자주 찾는 자들이다. 양주는 생각지도 못하고 소주에 오뎅국을 놓고 술 먹는 자들이다. 돈을 아끼기 위해 시내버스와 전철을 연계하여 환승하는 자들이다.

평수 넓고 높은 아파트 살돈이 없어서 12평, 17평, 좀 더 나으면 22평, 24평 빌라와 낮은 아파트에 사는 자들이다. 유기농, 친환경 농산물을 사먹을 수 없어서 수입농산물을 사먹는 자들이다. 백화점보다는 대형마트에서 쇼핑카를 몰고 다니면서 싼 휴지, 라면박스를 대량 구입하여 쇼핑카에 부피만 채우는 자들이다. 삶의 공간인 아파트는 작지만 교통수단은 적어도 2000cc급과 최소한도의 고급 웃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다. 골프장은 못가고 등산과 낚시로 호연지기를 키우는 자들이다. 길거리 자선남비에 돈을 1000원 정도 넣을 정도의 아량을 가진 자들이다. 교회나 성당, 절에서 헌금을 1000원 정도는 낼 수 있는 자들이다.

이렇게 서민은 자본의 개념으로 말해지는 중산층 서민이 아니다. 서민은 하루의 고달픔과 씨름하면서 하루하루를 이겨가며 사는 현실적으로 사회적 말단계층이다. 다시 말하면 해방된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돈독이 들어 대통령을 하고 국회의원 하려는 정치권력자와 제 잇속 챙기기에 혈안이 된 자본권력자, 그리고 이 두 권력과 손을 잡고 신도들을 울겨먹는 종교권력의 삶을 따라잡을 수 없는 자들이다. 결국 노예신분에서는 주인 밑에서 먹을 것과 잘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으나 자본가가 주인이 되고부터는 내 먹을 것과 입을 것, 살 것을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 의탁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노예생활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게 오늘날 서민이다. (2013. 4.26,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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