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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논단

생태아나키즘과 언어, 그리고 함석헌

by anarchopists 2020. 1. 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1/17 06:37]에 발행한 글입니다.

3.
칼 야스퍼스(K. Jaspers)가 인간이란 존재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즉 인간됨(Menschenwerden)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과학적 인식으로 낱낱이 인간의 실체가 밝혀짐으로써 인간의 실존적 신비를 상실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인 객관주의에 따라 인간의 본질이 다 드러난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고 했다. 다만 인간은 미완결된 존재이기 때문에 완결된 인간의 모습으로 가기 위한 끝없는 ‘실존해명’  (Exi -stenzerhellung)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자연세계, 인간의 삶의 세계는 모두 남김없이 파헤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한계는 분명하지 않은가. 다만 자연의 변화와 흐름, 자연의 그저 있음을 풀어 밝히는 자연의 본질적 해명만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논자는 인식의 한계에 자신을 개방하여 겸허한 마음으로 세계를 대하도록 하는 말, 바로 그와 같은 자연의 본질을 풀어서 밝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함석헌의 말법, 함석헌의 생태언어라고 생각을 한다. 말을 아끼고 침묵하는 것도 생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는 것이 우선순위이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을 경우는 말의 인색함으로 인해서 그 말의 쓸모를 잃기 때문에 비생태적이며,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것은 말의 과다하게 사용함으로써 말의 과다 소비로 말의 홍수와 뜻없는 남발만 가져 올 뿐이다. 함석헌의 말법 즉 함석헌의 로고스(logos)는 먼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언어를 실천적으로 사용한 언어철학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서 언어철학이라 함은 단순히 언어의 논리, 언어의 오류, 언어의 진리치 등을 판단하기 위한 논리철학적 개념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쓰임새를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에 맞게 적절하게 표현해 내는 것 또한 언어에 대한 철학적 태도이다.

오늘날 언어를 통해 시대적 문제와 통찰을 가져오는 말은 적고, 숱한 말장난과 속임, 그리고 포장된 언어만이 남무하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에서는 모든 것들이 값싼 상업적 언어만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런데 모름지기 언어란 여러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소리요, 마음 전달의 매체이다. 언어(言語)라는 한자어나 소쉬르의 언어 분석, 그리고 데리다의 언어분석만 보아도 인간의 언어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언어와 생태의 연관성을 보면, 언어의 사용법에 따라 그는 언어에 대한 해체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그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가 있지만, 그의 사상 전반을 담아내려고 시도하는 말의 아나키즘적 성격은 독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씨알’이라는 말에서도 많은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생명성과 근원성, 그리고 존재와 생성을 나타내는 말은 어떠한 개념과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의 사상을 이 말만큼 다 담아낼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바탈’[本性, 性], ‘앎답다’[아름답다; 人格], ‘삶’[生] ‘숨’[命], ‘돼감’[歷史], ‘틀’[機械], ‘틀’[格], ‘사람틀’[人格], ‘덧덧’[앎이 밝은 것], ‘꿈틀거림’[運動](다석 유영모의 언어를 빌림), ‘하나이신 이’[하나님], ‘켕김’[緊張], ‘옹글’[安全], ‘본뜸’[模倣], ‘속사리’[內面化], ‘겉사리’[外面化], ‘겉살림’[外的 生], ‘안살림’[內的 生], ‘저임’[자기임; 點] 등을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함석헌의 말법은 한자를 통해서, 또는 한글 자체를 분리, 연음, 늘임 등의 해체구성하여 의미를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그 단어나 개념이 갖고 있는 그 고유성과 원천의 깊이를 되살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촘스키(Noam Chomsky)가 말한 것처럼,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의 정신성을 통해서 논리와 진리를 제대로 드러내려는, 그래서 인간과 사회의 억압과 지배에 대한 비판적 저항의 담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말법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언어를 통해서 지배자의 언어가 아니라, 씨알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언어를 환골탈태하여 생명적인 언어,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들어내면서 그 안에 씨알의 정신이 숨 쉬도록 하려는 것 또한 생태적인 언어 혹은 생태아나키즘적 언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2010. 11.17 새벽)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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