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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논단

아나키스트 함석헌의 생태 아나키즘 1

by anarchopists 2019. 12.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2/28 06:56]에 발행한 글입니다.

[제3회 함석헌평화포럼 학술발표글-김대식]

아나키스트 함석헌의 생태철학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또한 세계-내-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라는 말은 이미 세계에 대한 경험과 인식의 지평에서 확정된 것이 아니라면 세계는 온전히 포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 세계는 세계로서 나에게 드러나 있는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 있다면 세계는 인식의 대상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계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그 경험의 세계를 자신의 존재 지평으로서 판단하고 세계를 대상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세계(이하 자연의 영역을 포함)는 단지 인식과 인간의 수단으로서의 경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인간이라는 주체의 삶의 세계이자 생명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세계 내에서 인간의 삶은 생명의 당위성을 확보하고 그 생명의 의무를 살아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나, 문제는 삶의 세계 내에는 다양한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세계 곧 삶의 세계나 자연은 인간의 삶의 세계로만 국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논자는 이러한 사유와 태도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탈중심적 세계, 탈중앙집권적 삶을 외치고 모든 인간의 권력이나 외부의 강제성에 대해서 저항하려는 ‘아나키즘’(anarchism)의 사유에 주목하고자 한다.

인간의 삶의 세계나 자연 세계에 대해서 폭력을 가하고 지배하고자 했던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의 실존적 상황은 지속적으로 삶을 위협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무모한 권력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인간의 지배뿐만 아니라 자연의 영역 안에서도 근본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논자는 어떤 의미에서 아나키스트적인 사상가이자 행동가라고 볼 수 있는 함석헌과 연관을 지으면서 함석헌의 생태아나키즘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생태철학이 갖는 아나키즘적 성격과 특징들을 살펴보면서 오늘을 성찰하고 내일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아나키즘과 생태철학을 접붙인 생태아나키즘

아나키즘이란 통속적으로 ‘무정부주의’라는 꼬리표로 규정된다. 그러나 그 단순한 정의만큼이나 아나키즘이 내세우는 논조와 행동은 무질서와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나키즘이 내세우는 근본적인 정신은 인간의 자유를 우선으로 하며 탈중앙화 사회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외부의 강요나 집중화 혹은 위계적인 권위에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이다.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의 다음과 같은 아나키즘에 대한 정의는 매우 정교하다.

“아나키즘: 인간이 만든 법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 자유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출하려는 철학. 모든 형태의 정부는 폭력에 의존하고 있고, 따라서 그런 정부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이고 해로운 것이라는 이론.”

더 나아가서 아나키즘의 기본 골조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열망하는 정치, 사회적 자율의 모형은 아나키즘적이며, 그 정신도 아나키즘적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국가나 정부, 그리고 이미 최소 국가를 넘어서 버린 거대 기업
이나 자본의 강제성에 대해서 절대적 자유를 지향하는 철학적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처한 모든 현상들이 인간의 지배와 통제, 자본으로 인해 물화된 정신들이 인간 존재가 지닌 고유의 정신세계를 잠식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밀란 쿤데라(M. Kundera)의 소설 제목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 인간은 마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몸서리치며 자유의 날개짓을 퍼덕여 보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자본과 국가는 인간의 삶을 좀먹고 지배와 통제, 그리고 심지어 죽임으로 몰아가는 것을 볼 때 과연 인간의 근본적인 사유와 행위를 떠받쳐줄 사조는 무엇일까를 처절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고 본다.

“아나키즘이 거부하는 것은 삶을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경제적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게임’으로 보는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이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소외의 원인은 ‘사람들의 수요충족에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에 있다는 확신을 마르크스와 공유한다.”

이러한 아나키즘의 사유는 선택에 기로에 서 있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 기존의 질서에 대해서 철저하게 해체해 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철학이 세계의 ‘변혁’을 위한 철학이라면, 아나키즘의 철학은 세계의 ‘전복’과 ‘저항’이라고 말을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저항이라는 어감자체가 갖는 묘한 메타포와 수사학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항과 전복은 단순한 감정적 어투나 허무한 카타르시스를 위한 개념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과 판단을 위한 이념과 행동 지침이다. 인간의 삶의 세계에서, 생명적 세계 자체를 수단화 해버리는 자본은 인간과 자연을 소외시키고 착취하며, 정부는 자본에 종속된 또 다른 형태의 자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게 된다. 국가는 자본을 위해서 자연을 유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인간의 삶의 세계와 자연의 생명 세계를 정치와 물신적 게임의 한 방식으로 풀어가는 것에 대해서 아나키즘은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아나키즘은 모든 억압이나 강압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오히려 자본과 정부가 부추기는 적자생존의 논리의 경쟁이나 성공 지향적 삶이 아니라 자연을 돌보고 함께-살고[共存], 함께-즐거운 사회[共樂]로 전회하자고 주장한다.

논자는 여기에 아나키즘의 중요한 생태적 언어와 사상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아나키즘 혹은 아나키스트의 언어는 경쟁적 언어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적이며 공생적인 사유가 담긴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거칠고 메마른 경쟁과 소외된 언어는 공존과 공락이 가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언급한 ‘전복’과 ‘저항’이라는 말의 연속선상에서 볼 때 공존, 공락, 공영, (상호)공생, 상호호혜 등은 모두가 아나키즘이 표방하는 사상과 세계적 표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만일 아나키즘의 생태적 언어들이 삶의 세계에서 실현되고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면 자본과 정부 그리고 그와 밀접한 연관관계에 있는 인간과 자연은 모두가 공도(共倒)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 만물이 저마다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일반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꾀하는 생태아나키즘“어떻게 자연과 인간 사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생태아나키즘의 선봉에 서 있는 머레이 북친(M. Bookchin)의 생태철학적 노선은 현재의 환경문제의 배경에는 사회문제 즉 인간의 지배에서 발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환경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본래적인 인간의 위계적 구조를 비판하고 종래의 생물중심주의의 관념적 성격의 반인본주의를 벗어나서 인간이성을 포기하지 않는 생태휴머니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이른바 생태아나키스트와 맥을 같이하는 사회생태론은 인간의 도구적 이성이 가지고 온 폐해를 지적하고 약육강식의 지배나 사회, 그리고 자연이 아닌 다양성을 존중하고 생물종간의 상보성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위하여 참여의 정치를 통한 민중화된 힘을 결집시키고 그로 인한 민중화된 정치를 지향한다. 이것은 결국 생태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민중 곧 씨알의 세계 경험과 인식의 성찰이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중요한 관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011.2.17, 김대식,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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