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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논단

생명적 존재자에 대한 예의와 방역 단계 유감

by anarchopists 2021. 1. 14.

생명적 존재자에 대한 예의와 방역 단계 유감

 

 

“이따금씩 일어나는 재해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제아무리 인간이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자연의 힘 앞에는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_G. Duby, 양영란 옮김, 서기 1000년과 서기 2000년, 그 두려움의 흔적들, 동문선, 1997, 183.

 

“살아라!”라는 절대명령에서 예외자는 없다!

 

절대명령은 생의 의지(Wille zum Leben) 혹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지닌 모든 존재자에게는 무례하고 무심하게 들린다. 절대명령은 그 명령을 내리는 주체와 그것을 이행해야만 하는 객체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자들은 자발적으로 타나토스(Thanatos)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하다. 당연한 말로 들릴 수 있으나 모름지기 생명의 속성이란 그렇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제거 프로젝트는 생명에의 의지를 수직적 차원으로 재편하려고 한다. 물론 생명에의 의지의 위계적 인식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생물학이나 생명공학에서는 인간은 생태계에서 늘 최상위적 존재자이자 지배적 존재로 본다. 하지만 지금 코로나 현상과 관련해서 만큼은 가장 힘없는 약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다시 바이러스를 박멸만 하면 인간 존재의 생명(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처럼 호도한다. 적반하장이다. 전체 생명체의 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생명에 위해(危害)를 가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생명체를 죽이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만 제거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처럼 말이다.

혹자는 바이러스가 무슨 생명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생물학계에서조차도 바이러스가 생명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아직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이에 철학자 캉길렘(G. Canguilhem)은 바이러스가 생명의 전조(前兆)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여인석·박찬웅 옮김, 생명에 대한 인식, 그린비, 2020, 107-108. 이하 쪽표기는 캉길렘의 책). 게다가 생명은 다른 생명과의 관계에서 적극적인 관여(관계, in-volvement)나 참여(part-icipation)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258). 생명과 생명 상호간의 개입, 관여, 참여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을 적으로 간주하고 다른 생명체의 영역을 유린한 인간이 생명적 상호 연대와 참여, 공존은 고사하고 소멸과 생존(인간생명만의 생존)을 다시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함석헌은 “역사의 흐름에 맑은 물, 흐린 물 따로 없다. 역사의 음악에 높은 악기, 낮은 악기의 구별이 없다. 있는 것은 다만 다만 오직 하나, “살아라! 뜻을 드러내라!” 하는 절대의 명령이 있을 뿐이니라”(함석헌전집1,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1983, 154)라고 말한다. “살아라!”라는 절대명령에서 예외자가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살아라!”는 명령은 어느 생명적 존재자에게나 절대다. 누구는 살고 어느 생명적 존재자는 죽어도 괜찮은 게 아니다. 살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존재자들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한다.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없이 최대치의 생명값을 누리려고 하면 그것은 욕심이다. 생명에의 탐욕과 과도한 욕망일 뿐이다. 너 없이 내가 있을 수 없다. 어느덧 우리 안에 차지하고 있는 너에 대한 사물적 인식(Es, 그것)은 기어코 동일한 인간 생명에까지도 차별을 두기 시작했다.

 

방재의 격상은 차선이다! 자본주의적 탐욕을 멈추는 게 최선이다!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바이러스로 인한 국경봉쇄조치와 신체 격리, 그리고 방재 단계의 수위를 인위적으로 조정하여 민중의 삶을 어렵게 하고 있다. 단계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점점 더 삶이 피폐해지는 대상은 민중이다. 바이러스가 아니라 취약계층, 저소득계층, 비정규직 계층이다. 잠깐의 재난지원금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내면서 다른 생명체와 관계를 배려하는 윤리적 삶을 지향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전폐하고 인터넷 온라인 체계, 인공지능투입, 단순 마스크 착용의 삶으로 전환을 강요받고 있는 삶에 대한 의구심과 반성이 필요하다.

정부시책 혹은 국가의 행정명령이라 해서 무조건 따를 수 없다. 절대명령이나 절대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급박한 사안이라도 시민들과의 소통과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국가, 정부, 의학계, 약학계는 무조건 강제 명령으로 민중의 삶을 정지시키고 있다. 정지, 중지해야 할 것은 지금의 디지털 일변도의 삶, 경제성장 우선주의의 삶으로 인한 반생명적 자본주의(적 구조)다. 생명은 그것을 멈추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생명적 쟁투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고, 경고한다.

캉킬렘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동물의 운동기관을 마치 전쟁기계의 부분들과 같은 도구(organa)로 간주하였다(162). 따라서 자연 안의 동식물, 무생물을 인간 주체의 환경(Um-welt)으로 인식하는 데서 그들도 주체(subject)라는 인식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222-232). 그들 없이 생명적인 것들, 생명적 존재자인 우리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107-108). 백신만 개발하면 현재 누리고 있는 이 안락한 삶을 또 이어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명적 존재자와 익명의 인간들에게 위험한 임상실험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상당수의 화학제품, 의약품이 과거 수많은 동물과 인간의 목숨 값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백신 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다. 생명에의 존중, 생명적 존재자에 대한 예의가 중요하다. 사람들의 겨울철 보온용 패딩을 위해 산 채로 털이 뽑히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위들과 오리들, 여성들의 예쁜 핸드백과 남성들의 고가 브랜드 서류 가방을 위해 산 채로 껍질이 벗겨져야 하는 파충류들, 달걀 생산에 불필요한 수평아리들이 분쇄기에 갈리는 죽음 등은 무자비한 생명 폭력, 생명 남용, 생명 학대입니다. 지금 그것을 멈추어야 한다. ‘제발 멈추어 달라는 항의의 소리가 바이러스다.’

모든 생명적 존재자들 중에서 실패한 생명적 존재자는 없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성공한 존재자라고 착각할 수 있으나, 언젠가 실패(사라짐)할지도 모른다(248-250). 인간은 위계적인 우월한 인식을 넘어서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동식물에 대해서 비판(批判)하는 만큼 동시에 상찬(賞讚)해야 마땅한 생명적 존재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우주적 생명공동체에 서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유독 바이러스에 대해서만은 그토록 관대하지 못한 것일까? 그러한 반세계, 반우주에 대한 악감정을 갖는 우리 인간 현존재가 오히려 괴물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285)

 

보편적 생명의 ‘뜻’만이 살 길이다!

 

중세사가들 중에 가장 뛰어난 조르주 뒤비(G. Duby)는 1348년에 일어난 흑사병의 공포에 주목한다. 그 최악의 병으로 유럽 인구 약 1/3이 사망했다. 당시 전염병을 옮길지도 모르는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면서 도시는 위축되었다. 게다가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무서운 질병 때문에 겁에 질린 나머지 사람들은 죄인을 색출하여 제물로 삼으려고 했으며, 유대인과 나병환자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혐의로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병을 내려 자신의 피조물을 벌하는 복수의 신(神)의 도구로 쓰인 이들을 탄압하는 잔혹행위가 도처에서 자행되었습니다. (…) 흑사병을 하늘이 내린 천형이라고 여긴 중세인들에게는 제물로 바칠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G. Duby, 앞의 책, 111-113). 오늘날과 같이 중세인들은 외부인과의 접촉을 차단하면 자신들은 보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고, 이러한 봉쇄조치태도는 19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마침내 전염병이 창궐했다가 수그러든 것은 병균에 대한 저항력이 몸속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염병이라는 재앙도 어떤 의미에서는 진보와 성장이 낳은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G. Duby, 앞의 책, 99-120).

함석헌은 “죽어야 산다”는 역설을 내뱉는다. “생명은 곧 ‘죽음으로 삶’이 아닌가? 그것이 ‘아가페’다. ‘인’(仁)이다. 살신성인이라 아니 하던가”(함석헌전집1, 앞의 책, 161). 따라서 생명평화는 역설에 있다. 이기적인 인위에 있지 않다. 이기적인 것은 생명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생명평화공동체는 나의 생명이나 너의 생명이나 모두가 선물로서 부여된 것임을 자각하는 무리의 사심 없음에서 비롯된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부속품이나 기계가 아니다. 불규칙성이나 병리도 아니다. 비정상도 아니다. 그 존재자도 하나의 특수한 개체성의 실존을 지닌 주체다. 필자는 캉길렘의 생각에 상당 부분 동조한다.

그러므로 코로나 사태를 본질적으로 접근한다면, 방재 단계(stage)의 상향과 하향 조정으로 민생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관료정치, 탁상행정은 심사숙고해야 한다. 다수의 시민을 위한다 하면서 소수의 민중이 죽고 있는 것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공리주의적 발상은 다시 소수의 엘리트 계급의 생존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니체가 빈정거리듯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보다 지체가 높은 인간들이여, 이 왜소한 덕을, 이 잔꾀를, 이 모래알 같은 배려를, 이 개미 떼 같은 잡동사니를, 이 측은한 안일을, 이 “절대(최대)다수의 행복”이라는 것을 극복하라”(F. W. Nietzsche,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4, 475).

거듭 강조하거니와 코로나 사태에 대한 대안은 방역 단계 조정에 있지 않다. 생명의 위계적 정치의 계단(stage)에서 내려와 생명과 생명이 나란히 수평적으로 만나야 한다. 생명정치, 생명권력으로 수많은 민중의 목숨을 자살로 몰고 간다면 그것처럼 허망하고 억울한 죽음이 어디 있을까? 잘못은 선진국의 자본주의가 저질러 놓고 그 피해의 몫은 수많은 민중들이 감당해야 한다면 이제라도 생명권의 투쟁과 저항이 있어야 한다.

함석헌은 “살아라! 뜻을 드러내라!”고 외칩니다. 뜻은 보편적이지만, 뜻을 가졌는가 안 가졌는가에 따라 위계가 설정된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단순히 생명적 본능에만 충실하다면 뜻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상호공존, 공생, 상호부조를 생명의 근본 바탈로 삼는 생명이라면, 그 생명적 존재자가 무엇이라도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오직 뜻만이 살 길이다.’ 치료예방약, 처벌법, 통제, 방재, 마스크 행동, 행정명령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이 순간에 어떠한 뜻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생명이냐 반생명이냐, 저항이냐 복종이냐, 비판적 인식이냐 맹목적 사견(私見/邪見: 臆見)이냐,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뜻의 무게중심을 살펴야 할 때다.

또한 지금 당장 이 상황을 멈추어야/멈추게 해야 한다! 어른들의 끝 모를 욕망으로 으레 마스크를 써야 하는 줄 아는 자녀들이 더 이상의 고통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진지한 고민과 논의가 있어야 한다. 나아가 민중과 민중의 느슨한 연대와 정치·생태적 행동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국가의 뜻보다, 정부의 뜻보다 민중의 생명에의 뜻, 삶에의 뜻이 앞선다. 국가의 권력의지나 정부의 권력의지보다 민중의 삶에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 국가의 정치, 정치가의 의지가 항상 진리일 수 없다. 그 의지의 불순물인 자본의 의지가 섞인다면 그 의지는 결코 생명에의 의지가 아니다. 죽음에의 의지가 더 강해진다. 국가나 정부가 항상 진리는 아니다. 오히려 자본이나 특정 이익집단을 위해서 거짓, 강탈, 폭압, 착취, 속임수가 마치 진리인 양 호도하고 부화뇌동해왔다. 따라서 진리의 척도와 판단 기준은 늘 민중의 뜻이어야 한다.

뜻의 보편성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뜻을 누가 갖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뜻이 항구적으로 보편적인 선이 되기 위해서는 민중, 곧 씨ᄋᆞᆯ이 깨어 있어야 한다. 뜻이 진리가 되고 뜻이 온전하게 발현되려면 민중이 뜻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뜻 없으면 민중도 아니요, 뜻 없으면 민중도 죽는다. 뜻만이 세계의 길이요, 뜻만이 진리요, 뜻만이 이 생명세계를 고칠 수 있다. 뜻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뜻을 찾고, 뜻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설령 민중이 뜻의 형이상학의 구현(현실태)하다가 자신의 생명을 양보한다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뜻 깊은 삶이 될 것이다. 민중이 사라지면 뜻도 무화된다는 확신과 신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뜻과 민중은 떼려야 뗄 수 없지만, 민중을 이끄는 것은 뜻이다.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이다.

 

절대 자유, 녹산(鹿山), 형암(炯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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