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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상태 박사 칼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by anarchopists 2020. 1. 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1/2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2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건에 따라 타인을 판단하고 행동하기 일쑤다
. 그래서 우월감 상자, 자격 상자, 이미지 상자, 열등감 상자 등등을 만들어 스스로 그 상자 안에 갇혀 산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서 바라보는 눈으로 세상을 재단한다. 굳이 종교라는 것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인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성적인 사고로 판단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그 이성적인 사고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실 이성이라는 말이 그렇게 매력적인 단어는 아니다. 어찌 보면, 이 이성이라는 단어도 하나의 우리가 설정한 또 하나의 상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이 이성이라는 상자 때문에 ‘이성’을 무기로 들고 나오는 사람에게 꼼짝없이 당하기도 한다. 예컨대, “너는 왜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한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고 하면 내가 이성적이지 못해 나쁜 사람 취급받기 일쑤이기에 자기를 포기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여기에 ‘과학’이라고 하는 단어가 덧붙여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과학’과 ‘이성’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이성이나 과학이 무소불위의 절대적 힘은 아니지 않은가. 르네상스시기에 ‘이성’의 위력이 대단했음은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그 위력을 걷어내지 못하고 그 속에 깊이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성격유형지표’라고 하는 MBTI(Myers - Briggs Type Indicator)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근본 목적은 어떤 유형의 사람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기 다른 모습인데 그 행동은 타고난 경향성으로 인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차이가 있음을 알아차리자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이겠는가? 바로 어울림 때문이다.

타고난 것은 훈련에 의해서도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고 한다. 다만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고, 보완하는 것이란다. 왜 극복하고 노력하며 보완하는가는 스스로 그 문제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울림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없애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활용하는데 목적이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는 다르다는 발견하는 것이다. 그 다르다는 것은 구별과 차별을 혼돈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구별과 차별’을 편리대로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별과 차별이 혼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오랜 시간 사귀어온 친구들을 이러한 성격유형지표 학습을 한 후 다시금 생각해 보니, 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껏 이해하지 못했던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문제의 해결 방법이 너무나 쉬워졌다. 예컨대, 사람은 각기 생활 형태를 보면 J(judgement)형과 P(perception)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단다.

J형은 판단형이라고 해서 외부세계에 대하여 빨리 판단을 내리고 결정하는 형으로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준비하고 실행하는 형이다. 따라서 치밀한 반면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대처가 부족하다. P형은 정보 자체에 관심이 많고 새로운 변화에 적응적이다. 많은 정보가 입력되어 있음에도 상황에 닥쳐서 문제를 해결하기에 대처능력은 뛰어나지만 치밀하지는 못한 즉흥적인 면이 있다. 그렇다고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구분된 틀에 맞추어 행동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측면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오래 사귄 벗들의 행동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떤 이는 계획적인데 우유부단하고, 어떤 이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즉흥적이고 하는 모습들을 보아왔다. 나 자신 또한 이 가운데 어떤 유형의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런 틀을 가지고 상대방을 저울질했던 것이다.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예단했으니 그 결과는 썩 좋지 못한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서 모든 탓을 상대로 돌려버렸다. 어찌 보면 너도 나도 이 같은 사실을 몰랐기에 지금과 같은 결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위와 같은 사실을 알고 다시 상대를 바라보니 엄청난 것들이 변하였다. 30 여 년 넘도록 친구라고 생각했던 벗에게서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고, 30년 동안 했던 이야기보다 지난 1년 동안 했던 이야기가 더 많은 정도가 되었다. 서로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둘 사이를 깨지 않으려는 그 어떤 안타까움에 불과했다. 해서 갑자기 친구가 제안한 여행을 기꺼이 받아들여 설레임으로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2011.1.24., 김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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