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밑으로부터 개혁을 이끌자

by anarchopists 2020. 1. 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1/14 06:40]에 발행한 글입니다.


밑으로부터 개혁를 이끌자.

"유럽의 역사가 밑으로부터의 역사발전이라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위로부터의 역사발전이다." 서양의 근대사회가 밑으로부터 자생적,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면 한반도,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는 위로부터 강제된 민주주의 사회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요, 사회주의 사회다. 서구의 근대의식은 15, 16세기에 이루어진다. 오늘은 근대사회의 특징을 통하여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해야”하는 당위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유럽은 르네상스․시민혁명을 통하여 자유민주주의가 형성되고 개별적 민족국가가 성립된다. 또 밑으로부터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확립되면서 상공업자ㆍ부유한 농민층이 대부분 자본가로 성장한다. 이들 자본가가 시민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국가들은 상호 대립․경쟁 과정을 통하여 근대화(近代化)를 추진해 나간다.

근대화의 추진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천착(穿鑿)하게 된다. 이것이 근대주의다. 근대주의는 계속하여 진화해 나간다. 20세기에 들어와 나타나는 국제화ㆍ세계화가 그것이다. 근대주의가 진화할수록 자본주의는 민주의의 권력과 밀착하여 세계침략을 심화시켜나간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점차 독점자본주의로 진화한다. 독점자본주의는 자본계급과 노동계급의 경제적 편차를 더욱 심화시켜 나간다. 자본주의의 자기생존법칙은 절대빈곤의 퇴치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가 진전될수록 절대빈곤은 사라지지만 ‘상대적 빈곤’은 더욱 심화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 결과, 자본계급은 더욱 부유하게 되고, 노동계급은 상대적으로 더욱 가난하게 된다.

한편, 16세기를 전후하여 봉건계급에 저항하는 공산이론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게 후반기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확립된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함께 근대주의의 한 사조가 되었다. 이 때문에 근대사회에서는 사회공동체 안에 자본주의와 시회주의가 상호 공존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 공식에다 대입해 볼 때, 남한의 경우, 사회주의자는 ‘빨갱이’이고, 북한에서는 자본주의자가 ‘반동’이 되는 사회형태는 결코 균형 있는 경제발전과 함께 완전한 평등사회, 평균사회, 균형사회를 이룰 수 없게 된다.

근대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상호 균형된 세력을 이룰 때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가 있다. 그래서 산업체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상대적 빈곤’을 퇴치하기 위하여 각종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교육현장에는 국가권력(교육부)의 강제와 학교의 교장, 교감, 부장선생들의 비교육적, 비합리적 권위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라 함.)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들 노동조합들은 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 노동조합은 빨갱이가 아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근대주의 사조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일각에서는, 특히 수구ㆍ보수들은 전교조에 가입한 선생님들을 빨갱이 교사들이라고 몰아세운다.

만약 기업이나 산업체에서 여러 노동조합이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노동자 가족들은 지금 승용차도, 냉장고도, 에어콘도, 딤채도, 아파트도 구하지 못한 채 경제적으로 상대적인 고통을 받으며 살아갔을 게 틀림없다. 만약 교육현장에서 전교조가 없었더라면 지금 쯤 학교에서 아동이나 학생들이 돈 있는 자와 돈 없는 자로 구분되어 자본가 자식들은 뽐내며 학교를 다니고, 노동자의 자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피고용의 입장에 있는 자들이 고용주에 대항하는 권리주장의 노동조합을 만든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논리이다. 그래서 국가권력의 일방적 통제로부터 구속당하지 않고 공무원의 책무를 다하여 국민에게 봉사의 직무를 다하고, 나아가 시민이익의 보호, 시민복지의 향상을 추구하는 ‘공무원노조’의 결성 또한 바람직하다. 바로 이러한 노동조합매체와 움직임들이 균형된 사회를 만들어가는 디딤돌이 된다.

이렇게 동아시아 사회도 근대주의에 영향을 받아 밑으로부터 근대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때문에 국가사회가 조금은 바람직한 사회로 진전되고 발전되어 가고 있다. 이들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한국의 경우, 일반적인 국가권력에 의한 개인권리의 통제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구속만이 있었으리라. 이들 노동조합에 의한 밑으로부터 사회변혁의 추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인간다운 삶을 포기한 채 노예상태와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늘 권력(정치와 자본)은 지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려는 생리를 가지고 있다. 피통치자나 소비자는 그들 권력과 행복 창출의 희생양일 뿐이다. 늘, 이들은 “국민을 위한다. 국가를 위한다. 서민을 위한다. 소비자를 위한다.”는 말을 입에 담지만, 이 말들은 지들 권력유지의 수단일 뿐이다. 국민과 소비자에 대한 기만의 언어들이다. 그런데도 국민과 소비자는 권력층의 이 말에 오늘도 내일도 속는다.

유럽의 근대사회는 시민계급(부르주아)에 의하여 산업사회가 달성되었기 때문에 시민 각자의 능력과 개성을 존중하는 평등사회라고 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상품적 가치일 뿐 평등한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예컨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타의에 의하여 불공평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완전한 평등사회는 이루기가 어렵다. 신체장애자, 언어, 시력, 청각 장애자들이 신체와 오감이 온전한 자와 완전한 경제능력의 평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면 잘못이다. 자본가 집안에서 태어난 애와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애가 똑같은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니까 능력의 강조는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이 그들만의 기득권을 누리려는 허구적 논리일 뿐이다.

한편 유럽이 오늘의 유럽이 된 데에는 시민 스스로의 자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럽은 근대화 과정에서 각자의 능력과 개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적이 있다. 그러다보니 능력주의와 개인주의가 극단적으로 이기주의화 하였다. 이기주의는 공공의 질서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공공의 이익도 무시되었다. 결국 시민계급 자신을 보호해주는 공동체질서가 깨졌다. 그러자 시민들 스스로 자각 하였다. 바로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시민의식’이었다. 곧, 국가의 법적 강제가 아닌 시민 각자가 밑으로부터 “공공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행동, 즉 근대적인 사회윤리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시민에 의한 밑으로부터 근대사회를 만들지 못했다. 위로부터 강제된 근대화를 맞았다. 이 때문에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시민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가진 자(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가진) 중심의 기망(欺罔)된 능력주의와 개인주의가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는 아직도 ‘공공의 이익과 질서’를 우선하는 시민의식이 적다. 이 결과로 자기중심의 우월의식이 강한 사회가 되었다. 특히 정치인들에게 이러한 자기중심적 심리는 더 잘 나타난다. 국가이익을 빙자한 자기중심적 정책반영이다. 4대강 개발이 그렇고, 형님예산이 그렇다. 교육계에서도 심하게 나타난다. 내 자식만 잘나게 키우면 된다. 여기서 학교에 치맛바람이 일고
교사들의 타락이 유도되었다. 그리고 사설학원도 횡행하는 원인이 되었다. 대형의 가전제품과 대형 승용차의 구입 또한 환경보전을 뒷전으로 한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의 발로이다. 공공교통수단(전철, 기차, 버스) 안에서도 모두가 자기중심적이다. ‘반말녀’, ‘패륜녀’의 유행어는 이것을 반영해준다. 또 음식점 등 공공장소에서 애들의 지나친 ‘고함과 뛰어놈’을 방관하는 부모들의 태도도 자기중심적이다. 자기의 애만 즐거우면 된다. 남의 기분 상하는 것은 뒷전이다.

우리는 아직도 서구로부터 강제 이입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우리사회를 사람답게 사는 터전으로 만들어갈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말한 산업체 노동조합이나, 교원노동조합이나, 공무원노동조합, 언론노동조합 말고 할 일이 또 있다. 독점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밑으로부터 개혁운동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협동조합운동이다. 농협, 축협, 수산협 등 관치가 아닌, 시민자발적인 협동조합운동이다. 곧 생산자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 의료협동조합, 건축협동조합, 교육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과 같은 협동조합운동이다. 개발독재자에 맞선 시민운동도 필요하다. 곧 환경 및 생태살리기운동이다. 종교권력에 맞선 종교개혁과 다문화확산운동도 필요하다. 언론권력에 맞선 ‘세상바로보는운동’도 필요하다. 뉴라이트의 그릇된 역사인식에 맞선 ‘역사바로보는운동’도 필요하다. 이러한 의식개혁운동과 실천을 통한 ‘밑으로부터 사회변혁’을 추구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한 근대사회로 나감과 동시에 탈근대를 이울 수 있다. (2003.5.22 초안, 2011.01.14 마무리,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