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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새 책 , 김대식, <교회몰락의 시대에 신을 말한다>(종문화사, 2020)

by anarchopists 2020. 6. 18.

 

목차

들어가는 말
종교는 정신적 가치의 거래입니다!

제1장 신을 현존을 말하는 고통/ 신의 현존을 말한다는 것
신의 현현으로서의 성스러운 물
하느님을 사유하는 몸
삶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
음식, 신이 주는 환희
복음, 공경 받는 종의 모습(재현)
희미해져가는 복음의 빛
그 사람이 특별한 이유
믿음, 하느님의 인정
우리를 붙드는 십자가
고통의 자비
신앙의 산고(産苦)
그리스도인의 이별의식
부활의 실재

제2장 신의 언어를 사유하는 고통/ 신의 언어를 사유한다는 것
신의 시원에 대한 사유
사랑만 받으면 되는 것일까?
사랑으로 하느님이 살도록 하십시오!
사랑, 하느님의 나타남
사랑은 어디 있는가?
구원의 밧줄을 풀고
공감(공동-정신/공통-정신)이 우주의 구원입니다!
성스러운 숨결, 성령
타자를 위해 헌신하는 생명적 존재
크레도 에르고 숨(credo ergo sum)
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계의 속임수와 하늘 뜻-소리의 참된 삶
그리스도의 삶, 부요한 가난

제3장 신의 언어를 실존으로 사는 고통/ 신의 언어를 실존적으로 산다는 것
실존의 상승은 고통스럽다
구원, 자유를 향한 문턱을 넘는 것
성전, 평화의 예수가 거하는 공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부르심의 소리에 다가감과 목소리의 구현인 선함
하느님을 닮는 삶의 법칙들
그리스도교 신자의 처세술
하느님을 닮는 삶의 법칙들
종교의 작동원리
실천하는 종교, 실천도 하늘로부터
부름의 형이상학적인 삶
그리스도인의 신앙언어 사용법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결, 그리고 거기(Da)

제4장 신의 현존을 기다리는 언어의 고통/ 신의 현존을 기다린다는 것
기도, 하늘의 창문을 여는 것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과 세계
침묵의 벽을 뚫고 오시는 로고스
섬김의 아득한 거리, 현존의 부재
삶의 세계에서 유한한 인간의 신앙적 생존법
구원의 물음, 신의 순수함을 보존하는 일
구원, 하느님의 웃음
몰락으로부터의 자유와 가능한 인간이 되기 위한 신앙의 날개짓
구원, 존재 이전의 존재인 그리스도의 만족?
믿음과 사랑의 종교적 선율
사랑과 감사의 역설
종말, 삶을 깨우기
사람됨의 부담, 그 거룩한 인간
신앙이란 신의 옷을 갖추어 입는 것

책 속으로

횔덜린은 〈파트모스, 홈부르크의 방백에게 바침〉라는 시에서 말합니다.

“가까이 있으면서
붙들기 어려워라, 신은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엔
구원도 따라 자란다.”(252)

신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자기 기분과 안정을 위한 존재로서 눈앞에 두기에는 녹록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존재라면 모두에게 신앙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인식은 믿음에 행위를 동반해야 가능합니다. 그런 긴장이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거니와 매력도 없을 것입니다. 잡기 어렵고 도달하기 어려운 것을 힘을 써가며 자신의 눈앞에 보이도록 하려는 신앙이 깊이를 더욱 달리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마르틴 하이데거조차도 횔덜린의  〈파트모스, 홈부르크의 방백에게 바침〉에서 철학적 영감을 얻었을까요?  

횔덜린은 〈파트모스, 홈부르크의 방백에게 바침〉라는 시에서 말합니다.

“가까이 있으면서
붙들기 어려워라, 신은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엔
구원도 따라 자란다.”(252)

신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자기 기분과 안정을 위한 존재로서 눈앞에 두기에는 녹록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존재라면 모두에게 신앙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인식은 믿음에 행위를 동반해야 가능합니다. 그런 긴장이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거니와 매력도 없을 것입니다. 잡기 어렵고 도달하기 어려운 것을 힘을 써가며 자신의 눈앞에 보이도록 하려는 신앙이 깊이를 더욱 달리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마르틴 하이데거조차도 횔덜린의 〈파트모스, 홈부르크의 방백에게 바침〉에서 철학적 영감을 얻었을까요?

“위험이 있는 곳엔
구원도 따라 자란다.”(252)

그만큼 나의 눈앞에 신을 나타나게 하고 보게 하는 것은 나의 삶의 습관들에 대한 변혁이 아니면 어려운 일입니다.

 

출판사 서평

종교는 명시적으로 근원적인 말과의 만남입니다. 마르틴 부버(M. Buber)가 말하듯이, 그것은 ‘나-그것’의 근원어가 아니라 ‘나-너’의 근원어입니다. 그럼에도 종교는 나-너, 나-당신의 초월자와의 만남에서 파생된 근원적 삶을 언어적 삶 혹은 삶의 언어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말은 다시 세계와 거래를 해야 합니다. '태초에(en arche) 말이 있었습니다.' 말은 시원적이고, 말은 만남이고, 말은 사유입니다. 그래서 말은 초월(자)을 지시합니다. 정신으로 비약하게 합니다. 그게 종교와 철학의 말이어야 합니다.

종교는 명시적으로 근원적인 말과의 만남입니다. 마르틴 부버(M. Buber)가 말하듯이, 그것은 ‘나-그것’의 근원어가 아니라 ‘나-너’의 근원어입니다. 그럼에도 종교는 나-너, 나-당신의 초월자와의 만남에서 파생된 근원적 삶을 언어적 삶 혹은 삶의 언어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말은 다시 세계와 거래를 해야 합니다. '태초에(en arche) 말이 있었습니다.' 말은 시원적이고, 말은 만남이고, 말은 사유입니다. 그래서 말은 초월(자)을 지시합니다. 정신으로 비약하게 합니다. 그게 종교와 철학의 말이어야 합니다.

말은 항상 지금 여기서 해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은 시원을 품고 있기에 그 시원성을 풀어 밝혀주어야 합니다. 태곳적 삶, 순수(지향적)한 삶의 원형은 태초(arche)의 말(logos)을 분석하고 명료하게 인식해야만 존재자에게 현존합니다. 행위가 변합니다. 행동이 생깁니다. 말이란 그렇습니다. 언어(language)는 약속이지만 말(logos)은 행동을 강제하는 기호입니다. 성서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다가옵니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횔덜린(Johann C. F. H?lderlin)의 시어들을 통해서 철학적 사유의 단초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철학적 삶을 더 견고하게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시인의 언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실존적인 현존재(Dasein)로서 새로운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입니다. 필자는 하이데거처럼 존재론적 해석과 실존적 삶을 가능케 하는 언어적 힘에 동감합니다. 그런 지평에서 볼 때, 횔덜린의 시어들을 통한 성서 읽기는 바로 현존재의 실존적 삶을 추동시키기 위한 작가적 욕망의 투영입니다. 동시에 신앙인의 삶도 일상인(das man)의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종교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횔덜린의 아름다운 언어를 거래하여 칸트(I. Kant)가 말한 ‘도덕의 상징으로서의 미(美)’를 성서적 미적 실존의 아르케로 삼고자 한 필자의 고통스런 편린의 감성이 독자들의 주관적 보편성으로 와 닿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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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도서는 일반적인 성서 풀이나 가능한 한 교회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철학적, 문학적(횔덜린을 통한) 표현으로 텍스트를 풀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식상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도그마에 의한 텍스트 분석이나 이해가 아니라 보편적인 이야기, 신에 대한 이성적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엮은 글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종교 이해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식상한 신앙언어를 탈피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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