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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문(門)이 없는 문으로 들어가는 신앙: 충고선도(忠告善道)

by anarchopists 2020. 6. 22.

()이 없는 문으로 들어가는 신앙: 충고선도(忠告善道)

 

예수가 삶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일반적인 삶이든 특정한 종교적 삶이든 드나드는 문(門)이 있으면 그 문을 목적으로 삼으면 편할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삶에 대해 지침을 내려주면 참 편할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정리도 해주고 판단을 내려준다면 그처럼 쉬운 삶이 어디 있을까요? 남송시대의 선승인 혜개선사(慧開禪師)는 무문관(『無門關』)에서 “마음의 이치를 깨달아 들어가는 길에는 문이 없는 것을 문으로 삼는다(無門爲法門)”라는 말을 합니다. 문은 출(出)과 입(入)의 역할을 한다는 상식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은 오히려 문이 없음으로 인해서 문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합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과정 이전에 문을 찾아야 합니다. 문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들어갈 만한 문이라면 들어가겠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닐 수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영영 나오지 못하는 문도 있습니다. 삶에서도 수많은 문이 존재합니다. 문에도 차별이 존재합니다. 종교에서도 문에 대한 이야기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깨달음의 문, 실존적인 문, 삶의 문은 서로 다른 듯하나 실상은 동일한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을 통해서 드나들다 보면 삶과 죽음의 실존적 사태나 현실적인 상황 안에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죄로 인해서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을 구원하는 문의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문지방을 넘어서 삶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죄라고 하는 유한한 인식과 실존적 상황들에 걸려 있습니다. 삶 저편으로 완전히 넘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할 때 예수는 바로 문 앞의 모든 실존적 문제와 죽음을 넘어서 생명의 문, 삶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문은 좌표이고 반드시 통과를 해야만 하는 어떤 장소(Platz; Ort)의 경계입니다. 만일 죄의 장소가 있다면 그 죄의 장소를 벗어나 생명과 삶의 장소로 들어가도록 안내하여 궁극적으로 들어가는 공간(Raum)이 있습니다. 삶의 공간은 거침이 없고 탁 트인 곳입니다. 거기에는 죄의 유한성과 관계가 없습니다. 마음의 공간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욕망을 성취할 수 있다면 어떤 문이건 상관없이 드나들려고 합니다. 장소나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간이 자유로운 사고와 행위가 가능할 때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진정한 자유로운 삶의 문을 찾고 싶을 때는 말이 달라집니다. 그 문이 삶의 문인지 진실의 문인지 진리의 문인지 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 앞에서 판단을 잘못하면 죄의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문은 모두가 환대하듯이 열려있지만, 일단 들어가면 죄라고 하는 권력 앞에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문을 잘 찾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가 진리의 문, 진실의 문, 삶의 문에 다가가도록 해 주는 투명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은총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점차 “계속해서 죄를 짓는”(Perma nebimus in peccato) 무리들만 많아집니다. 진리 그 자체, 진실함과 삶의 순수함을 품고 있는 예수로 나아가는 구원의 공간을 급기야 자신이 가로 막고 서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조차도 잘 모릅니다. 문의 외형, 크기, 색상, 디자인, 안전성, 가치, 상품성만을 따질 뿐 문에 매달려서 문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가리키는 예수와는 전혀 관계없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는 문이 없는 세계에 문이 되어 준 존재입니다. 문이 안 보이는 세계에 문이 보이도록 해 준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문을 보지 않을 뿐입니다. 다른 욕망적인 문을 찾고 있기 때문에 문이 문으로서 기능하지 못합니다. 문을 막아서는 종교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뿐만 아니라 환상의 문, 가짜 문이 진짜 문 노릇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몽환적인 문에서 죽고 구원의 문에서 산 사람들입니다. 가상(假象)처럼 보이는 삶으로 들어서는 문으로 사람들을 이끌 수 있습니다. 생명의 문은 없는 듯이 보이나, 그 문은 진짜배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투명하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문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공자는 번지(樊遲)에게 인(仁)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 <顏淵>, 22장)이라고 하면서, 자공에게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조언을 해 주고 잘 인도하되, 그래도 할 수 없다면 그만둘 일이지, 스스로 욕을 당하는 일이 없게 하여라”(子貢問友 子曰 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 <顏淵>, 23장). 정치가든 벗이든 종교인이든 사람을 사랑하고 좋게 인도하는 것, 그것이 문이 없는 세상에서 탈출구를 찾는 훌륭한 방책일 것입니다. 예수가 그 문이 아닐는지요.

 

인간의 절대고독, 곧 하나님 안에서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그리스도와 죽음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경험을 의례(ritual)로 풀어서 밝혀주는 일생의 중대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죽음과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적 고독으로 자기를 내던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례의 사건은 자기를 무화시키는 것, 자기를 온전하게 비우는 첫 단추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통과의례가 아닙니다. 종교적 의식으로는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답게’가 되려면, 자기를 비우는 절대적 고독(solitude)을 자처해야 합니다. 절대자와 일치하고자 하여 예수처럼 ‘오직’, ‘혼자’(solus)와 같은, 비슷한(유사한, similitudini)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지금의 삶을 선물(donum)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cum) 죽었고 함께(cum)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고백이 보편성을 띠려면 지금의 욕망적 삶, 이기적 삶, 반생명적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절대적 고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절대적 고독에 내맡겼습니다. 아나키스트 박홍규 교수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 공간적 외로움(aloneness)을 견디지 못해서 일정한 공동체에 귀속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외로움을 달래는 의존적인 존재로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자발적인 절대적 고독에 내던졌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존엄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세계의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스스로 유리(遊離)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절대자와 더 가깝게 되었습니다. 그는 절대자와 가깝게 되는 수단으로서 십자가를 택했습니다. 십자가야 말로 절대적 고독의 자리입니다. 죄의 노예 상태(servianus)로부터 벗어난 독존(獨存)이 가능하게 만든 독처(獨處)의 자리입니다. 독존과 독처는 인간에게 죽음의 실존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격리시키는 삶이어야 예수처럼 절대자와 닮은 신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틴어 cum이 주는 무게를 견뎌낼 수 있는 인간(신자)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예수와의 동일성을 살아내려는 존재론적 삶을 알면서도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세상과 교회가 시끄럽습니다. 자발적으로 절대적인 고독을 추구하려는 독존자가 되기 보다는 기회주의적인 회색인간(회색 종교인/회색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쩔 수 없는 삶이라고 자위하기에 바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Si enim complantati facti sumus similitudini mortis eius, sed et resurrectionis erimus). 이 말이 주는 의미가 단순한 고백으로 그친다면 세계는 변혁되지 않습니다. 세계의 변혁은 예수와의 닮음에 있습니다. 절대적 고독으로 내던지면서 예수다운 노릇, 제대로 된 신자다운 노릇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는 절대자, 곧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 갔습니다(vivit Deo). 예수는 절대자 안에서 사는 것이 절대적 고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산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목에 숨이 붙어 있다고 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을 극복하고 생존을 넘어선 절대적 고독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렇습니다. 비우지 않고 채우려고만 합니다. 저마다 자기의 것, 그것이 물질이든 권력이든 신분이든 명예든 혈육이든 인간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순간, 절대적 고독은 어렵습니다.

성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와 함께 절대자, 곧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viventes autem Deo in Christo Iesu)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추구는 비움을 통한 절대적 고독입니다. 물론 성서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라’(existimate)라는 식의 완곡어법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라틴어 existimo는 aestimo(값을 매기다, 벌금을 결정하다)의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한글번역보다 훨씬 더 현실감이 느껴지는 강력한 행동을 요청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삶의 자리와 방향성 그리고 목적지를 하나님에게 두어야 한다는 엄정한 전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그래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거니와 비종교인이라도 절대자에 대한 의식이 있다면(설령 없다하더라도) 절대적 고독이라는 삶의 지향성과 행선지는 공통의 인간적 과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6,1-11)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강사,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간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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