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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사유보다 더 음란한 것은 없다 / 知者不惑 思不出其位

by anarchopists 2020. 7. 6.

사유보다 더 음란한 것은 없다 知者不惑 思不出其位

 

신의 법, 곧 신의 선의지만이 나를 구원합니다!

 

나의 법은 나 자신이 유한적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적어도 나의 원칙이나 규칙이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아니라면 그저 개인적일 뿐입니다. 과거 율법은 인간을 몽땅 한 묶음으로 규정하는 절대적인 법칙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개인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물론 그 신앙적 법칙이 신에게서 비롯되었다면 모두가 지켜야 할 마땅한 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각각 다른 신앙의 입법자들이 서로 자신의 법칙이 절대적이라고 우겨댄다면 그것의 근원은 신의 법칙이 아니라 자신의 법칙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나의 법이다, 나의 규칙이다, 나의 원칙이다, 라고 말할 때는 그 원본적인 원칙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잘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기의 마음이 죄로 가득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갖고 있음에도 타자에게 자신의 법칙을 강요한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것이 신 바깥으로 나가게 만드는 삐딱한 법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폴란드 작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 Szymborska)는 “사유보다 음란한 것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시적 언어치고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는 표현입니다. 머릿속 생각은 개인적이고 속에 감춘 마음들이 그득하다면 사특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개인의 법칙이란 그렇습니다. 내면에 쌓인 자기 아집과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정보(data)는 말대로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철학자 팀 르윈스(Tim Lewens)가 말한 것처럼 수백 개의 기술적 가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일 뿐입니다. 자신의 규칙이나 법칙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선을 행하다가도 악을 행하고, 반대로 악을 행하다가도 선을 행하는 상대주의에 빠집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신앙으로 흐르게 됩니다. 개인의 머릿속으로 상정한 법칙 혹은 신앙법칙이 오류를 범하고 기회적이고 타산적인 과정과 결과로 나타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공자도 관념적인 말을 내뱉는 사람의 그것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지 않으면 정치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말이란 그와 같이 기약할 수 없는 것입니다(말이라는 것이 그렇게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에 ‘나는 임금 노릇하는 데 즐거움이 없고, 다만 내가 말을 하면 내 뜻을 어기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만일 그 말이 선하여 그것을 어기지 않는다면 또한 선하게 되지 않습니까? 만일 그 말이 선하지 않는데 그것을 어기지 않는다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게 되기를 기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子路>, 15장).

말이나 법칙은 단순히 개인의 머릿속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신적 기원을 가진 법칙이어야 보편타당할 수 있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법칙은 다릅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도록 강제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을 행하려고 하는 법칙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아무리 죄가 아니라 죄인이 올바르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더라도, 인간 내면에 있는 죄의 힘은 매우 강합니다. 죄는 신의 법칙을 거스르게 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억압합니다. 선한 행위를 사유나 생각 속으로만 머물도록 할 뿐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못하도록 신의 법칙을 밀어냅니다. 인간 자신의 한계를 넘으면서 실행에 옮기려는 선을 망각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면 결국 무시로 사람들이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을 해도 그 말은 허언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선을 행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발언을 했다면 반드시 현실화하는 것이 종교인이 신의 보편적인 법칙 아래에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나에게서 비롯된 법칙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기원하는 법칙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을 행해야겠다는 생각은 신의 보편적인 법칙이 나에게 의지를 불어넣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해도 그리 되지 않는 것은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 때문입니다(quod habitat in me, peccatum). 위안이 될지 모르나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non ego operor illud). 내가 그렇게 헹동하거나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자각하고 저항할 수 있으려면 다른 대안이 좀 필요합니다. 어려운 말 같습니다만, 신앙적 ‘반증주의’(falsification)가 요구됩니다. 이것은 철학자 칼 포퍼(K. Popper)가 말한 개념인데, 나의 이론이나 생각이 내동이쳐질 수 있는 가능한 증거가 나오면 언제든지 목이 잘릴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법칙, 곧 내가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신앙의 법칙도 개인의 학습과 편견 그리고 외부의 정보에 의해서 굳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빛에 의해서 거룩하고 경건한 법칙을 깨닫게 된다면, 내 신앙법칙을 상대화시키고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전히 나의 법칙이 절대적인 것인 양 생각하고 편협한 신앙 사유의 절대성을 고집한다면, 그것처럼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 신앙법칙에 입각하여 선을 행한다 한들 그것은 자신의 선이지 신의 선이 아닙니다. 자신에게만 만족스러운 선이지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보편적인 선이 아닙니다. 신의 법칙 혹은 신의 선의지(善意志)가 아닌 이상 인간의 욕망적 육체 안에서 비롯된 선이 선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Scio enim quia non habitat in me, hoc est in carne mea, bonum)라는 고백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성의 법을 좇아 신의 법을 따르려고 노력하십시오!

 

우리는 삶의 윤리적, 신앙적 실천을 행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두 가지의 마음이 싸운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나는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할 때는 이상하게도 그 한 마음이 다른 마음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malum)의 마음입니다. 증자(曾子)는 “군자는 생각하는 것이 자기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君子 思不出其位. <憲問>, 28장)고 했습니다. 인간이 악의 마음을 품고 선을 행하지 못하는 것도 신의 법칙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곧 증자가 말한 군자의 위치,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자기 본래의 위치나 정체성 혹은 신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신의 법칙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라는 고유한 인식 말입니다. 그게 없이 한 인간이 진정한 종교인이 된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것을 지향하지 않고서는 종교인으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법칙(legem)은 하나의 법칙, 곧 신의 선의지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 법칙은 영원합니다. 그 선의지 혹은 신의 법칙을 따르는 인간의 정신의 법, 생각의 법(legi mentis)은 결단코 죄에 사로잡힌 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마음 속에서 신의 법칙(legi Dei)과 죄의 법칙(legi peccati)이 우리 마음에서 싸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참으로 비참한/불행한/불쌍한 인간입니다(Infelix ego homo). 그럴 때 우리에게 좌표가 되는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Gratias autem Deo per Iesum Christum Dominum nostrum). 예수는 자신의 삶의 법칙, 인류를 위한 전반적인 삶의 법칙을 신의 법칙, 곧 하나님 아버지의 법칙에다 맞추려고 하였습니다. 신의 법칙은 은총입니다. 죄에 빠져서 선이 아니라 악을 행하려 할 때조차도 기여히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처럼 신의 법칙에 따라서 살려고 애쓰는 자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총의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죽음의 육체(corpore mortis)를 갖고 있는 한 자신을 해방(liberabit)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오죽하면 공자도 “군자의 도가 세 가지가 있는데, 나는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인(仁)한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子曰 君子道者三 我無能焉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 <憲問>, 30장)라고 말을 했을까요? 그만큼 육체의 죄의 욕망에서 벗어나서 신의 법칙에 따르면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per Iesum Christum;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빌려/방편으로) 부단히 신의 법칙을 향해서 나아가는(ego ipse mente servio legi Dei) 연습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신의 도구나 소유가 되어 그를 섬기는(servio) 것, 그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해방이 아닐까요?

(로마 7,15-25)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강사,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간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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