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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내 영혼이 치닫는 날

by anarchopists 2021. 1. 18.

내 영혼이 치닫는 날

 

야훼는 인간의 영혼에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우리 인간은 이 우주에서 특별한 존재라고 일컬어져 왔습니다. 도구를 쓸 줄 알고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특수성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제들이 하나둘씩 깨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고, 인간도 최상위의 포식자로 군림할 수 없는 나약한 동물이나 사물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고이래로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종교들은 인간이 영혼을 지닌 특별한 존재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 영혼은 불멸한다고 믿고 죽은 이후에도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새해 아침>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바다가 토해 내는/ 아픈 기침 소리에/ 새벽이 눈을 뜬다/ 묵은 날들을 사르고/ 새로운 태양이/ 너울대는 도포자락”(이해인, 내 혼에 불을 놓아, 분도출판사, 1984, 110). 이해인 수녀에게 하루의 시작은 생명의 자기 확인을 위한 몸의 반응에서 나타납니다. 토해내는 듯한 기침소리는 잠든 미명을 깨웁니다. 아직 완연한 밝음이 아닌 경우에 소리는 새날을 알리는 기척이 됩니다. 모든 생명적 존재자들은 그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뜹니다. 소리는 영혼을 울리고 깨우는 각성이요 새날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입니다. 그럼으로써 새날은 낡은 날을 뒤로 하고 밝은 태양빛 아래 모든 생명들과 함께 날갯짓을 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역사적 고통과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사건은 마치 야훼가 새로운 영혼을 토해 내는 것과도 같습니다. 다 죽었던 영혼, 밤과 같이 고요 속에 침묵하고 있던 영혼을 불러내어 이제는 새벽이니 일어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입니다.

그 날은 처음의 날입니다. 다시 첫날, 그 첫날에 사람들은 야훼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묵은 날을 버리고 새 날을 맞이하고, 새 날에 숨결을 불어넣으려는 인간의 열망에 하나님은 화답합니다. 새로운 해방의 날에는 모든 존재자들이 회복되고 살아날 것입니다. 야훼는 새로운 태양이 되어 온 세상을 비출 것이며, 그 너른 빛으로 세계를 감쌀 것입니다.

물론 해가 바뀌어도 어제의 날이나 오늘의 날이 다르지 않은 날일 수 있습니다. 별것도 아닌 첫날인지도 모릅니다. 한수산의 냉소와 자조 섞인 수필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새해, 새날…… 이 새로울 것 없는 ‘새’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까지는 너무 많은 새해 새날이 나에게 필요했었다. 아무것도 새로 시작할 수 없는 나이에 와서야, 비로소 그 ‘새’자가 뜻하는 반역의 의미를 알다니. (…) 낡은 어제와 같은 낡은 오늘, 낡은 오늘과 같은 낡은 내일이 고리를 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다만 우리들의 바람이었을 뿐, 또 하나의 달콤한 속임수인 것이다”(한수산, 우리가 돌리는 영혼의 물레, 자유문학사, 1988, 10-11).

하지만 새날은 모든 것을 돌아오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날이요 새로운 기회요 새로운 생명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고통과 행복 사이를 가로질러 새로운 삶의 장이 열리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눈을 뜨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새로운 부름과 새로운 생명을 약속하겠다는 의지를 엿보게 됩니다. 새날에 대한 약속은 내가 눈을 뜨는 순간에 열리는 구원과도 같습니다. 아니 새날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준 구원입니다. 다시 돌려서 제자리에 삶을 배치하여 기어이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질서 속에서 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야훼는 인간에게 기쁨의 날들을 허락하십니다!

 

남아 있는 나날들이 새로운 날들로 인해서 더 값지게 되려면 낡은 시간 속에 영혼과 육체를 던져놓고 마냥 눌러 있으면 안 됩니다. 낡은 시간을 버리고 하나님이 구원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그 시간과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낡은 시간에 얽매여 타성에 젖어버린 신앙과 삶이 되어버리면 삶은 고착화되고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잊게 마련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 후반부를 마저 읽어보겠습니다. “무녀(巫女)처럼 춤추며/ 나의 혼(魂)이 치닫는/ 당신의 나라/ 독 묻은 빛 화살에/ 차라리 눈먼 나비어도/ 가지 않고는 못 배기겠네/ 아아/ 어디서 바람은/ 길을 막고 있는가”(이해인, 내 혼을 불을 놓아, 분도출판사, 1984, 111).

춤을 추고 혼이 상승을 하는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구원은 Redemit, 즉 ‘다시 몸값을 내고 구해내다’, ‘다시 사다’, ‘자유의 몸으로 만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날, 새로운 시간을 허락한다는 것은 새로운 구원의 시간을 사서 인간에게 베푼 것입니다. 새로운 시간이 인간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그 시간을 증여한 자의 질서로 편입되어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준 이는 자신의 시간을 준 것이고 영원의 시간을 준 것입니다. 그것이 해방입니다.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을 같이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 해방입니다.

눈 먼 나비처럼 앞을 볼 수 없다하더라도, 약자들이라도, 바로 그들이 새로운 시간과 날을 허락받은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이 멀어도 바람이 막아도 영원한 시간,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신앙의 초월적 감행으로 그 나라로 들어가도록 (큰 아들로) 자격을 바꿔주는 은총을 잊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시간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에 당신의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liberavit(무죄를 선고하다, 자유를 주다, 풀어주다)를 주었습니다. 새날과 새 장소와 새 시간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시간은 당신 자신을 주는 시간이요 모든 지배로부터 인간을 풀어주는 시간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해인의 시에서처럼 새날은 무녀가 춤을 추듯이 즐거움을 만끽하는 시간입니다. ‘즐거워하다’, ‘기뻐하다’라는 라틴어 laetabitur는 형용사 latus(기쁨을 주는, 비옥한, 풍성한, 살찐)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낡은 날을 털어버리고 새날을 주는 하나님의 시간은 모든 것이 회복되며 수많은 존재자들이 함께 즐거워하는 때입니다. 그날에는 약자인 어린이들로부터 시작해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신이 베푸는 풍성한 마음의 시간에서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시간은 공평합니다. 새날은 누구에게나 새날이요 희망입니다. 권력이 있고 돈이 있다고 해서 새날을 더 많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존재라 하다고 새날을 향유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새날이 되면 신은 슬픔에서 위로로, 근심에서 기쁨으로 바뀌게 할 것입니다. 배고픔의 시간에서 배부름의 시간으로 펼쳐지는 지상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시간이 품고 있는 것은 그러한 희망입니다. 약속을 품고 있는 시간은 언젠가 흥겹고 풍요롭고 바람조차도 길을 막지 못하는 강한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그 새날이라는 시간은 주께서 보증한 시간이요 주께서 단언하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신의 시간을 모든 존재자에게 주겠다고 말한(ait; aio) 시간입니다. 라틴어 성경의 ait Domine를 공동번역은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고 풀면서 신의 주체적인 의지를 더 강력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므로 낡은 시간, 낡은 날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쁨과 위로, 즐거움과 풍요로움으로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도록 하겠다는 신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갖고 새날, 새로운 시간을 살아낼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렘 3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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