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9/25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은 혁명운동의 가능 조건을 크게 3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지도 인물, 조직, 이론”이다. 당연히 혁명운동의 주동 세력은 인간, 즉 혁명을 이끌어 나가는 ‘지도 인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지도 인물은 사회의 부정・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70쪽) 혁명운동의 정신적 바탕은 사회의 모순과 구조를 타파할 뿐만 아니라 모순적 삶의 방식을 뜯어 고치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혁명운동을 이끌어가는 인간의 의식은 다른 누구보다도 정의에 대한 사유와 실천에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 현존재의 삶의 세계에 탈구조, 탈체계적인 지향의식이 혁명운동의 방향을 바꿀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혁명운동의 가능 조건은 ‘조직’이다. 이 조직은 민중의 지혜, 민중의 힘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다. 함석헌은 “생명진화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정신 생활은 인간의 조직적 사회를 통해서 발달했다.”고 말하면서 ‘종교’라는 조직이 가장 높은 조직이라고 평가한다. 강제성이 없는 조직, 무형의 조직.(함석헌, 위의 책, 71쪽) 어쩌면 조직이라고 해서 일정한 집단적인 세력, 단합적인 힘의 행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직은 정신적 규합체, 정신적 공동체, 다시 말하면 정신의 총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민중의 정신이 모인 것, 그런데 그 이성적 모습, 그 에너지의 추동을 가능하게 해줄 매체가 종교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탈구조, 탈체계적, 탈모순적 혁명운동을 전개하겠다면서 되레 또 하나의 권력 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은 자체의 모순을 가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배적인 이성적인 인간은 권력 관계 속에서 자기를 구속하고 나아가 자기에 복종된 타인들도 구속한다.”(김진석, 초월에서 포월로, 솔, 1994, 105쪽) 그러므로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라는 조직은 아나키(anarchie)이다. “넓은 뜻의 아나키는 단순히 정부나 권력을 뿌리째 부정하는 데로 빠지지 않는다... 좋은 아나키는 오히려 넓은 비시대성 또는 탈시대성과 같이 가는 탈권력의 움직임이다.” 민중의 힘, 민중의 총체적 정신(전체 정신)은 늘 비시대성, 탈시대성, 탈권력이라는 점에서 아나키와 닮아있다. 그래서 조직을 통한 혁명운동(반란)은 “아름다운 놀이, 위험한 놀이”이다.(김진석, 위의 책, 17쪽)
마지막으로 혁명운동의 가능 조건은 ‘이론’이다. 이론은 혁명운동의 주도 인물과 조직과의 연관성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그러면서도 민중 정신의 모음이다. 민중 정신이 하나로 모인 것, 하나가 되도록 하는 정신, 그것이 이념과 이상이 될진대 그것의 근본적인 실체와 의미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이론이 되겠다. 다시 말해서 이론의 밑바탕은 민중을 하나 되게 만드는 정신적 실체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혁명운동을 하는 데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민중의 자기 의식, 민중을 자각하게 만드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고서 혁명운동을 한다는 것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민중의 의식 저변에 흐르고 있는 행동의 규범, 행동하게 만드는 강한 의지와 동기는 민중 스스로에 의해서 각성된 정신에서 나온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운동은 나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적 총합체의 공동 구성원인 타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타자와 더불어 만들어 가는 혁명운동이기 때문에 타자는 반드시 공통되고 합의가 이루어지는 대화적 사고의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타자가 가진 정신(geist)은 무엇인가, 타자의 혁명운동의 시대적 정신은 어디에 기반하는가를 정신적으로 교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운동의 시대착오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함석헌은 그 이론[理]을 자기 깨달음, 세계관, 인생관이라고 말한다. 자기를 볼 수 있는 눈, 타자를 볼 수 있는 눈, 세계와 인생을 볼 수 있는 눈, 다시 말해, 봄의 철학적, 봄의 직관적, 봄의 감성적 바탕이 곧 혁명운동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함석헌, 앞의 책, 71-72쪽).
함석헌은 혁명운동이 철저하게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혁명은 민중, 즉 민중 전체의 직접적인 운동이 되어야 한다. 민중은 시대와 함께 하지만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 시대 앞에 놓여 있는 문제(과제, pro-blem)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보다 앞선 미래를 향해서 자신의 이상세계를 던져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민중은 어리석은 존재, 즉물적 존재, 현재의 빵만 생각하는 단순·순진 무지몽매한 존재가 아니라 문제의 핵심을 부수고 미래를 향해 꿰뚫고 나아가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스스로 하는 인격이요 스스로 하는 정치의 요체이다. 민중은 민중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시대적 호흡이 무엇인지를 자각해서 시대를 비판하고 이론과 방안을 세우고 감시할 수 있는 자기 운동, 자기 이성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하는 것이 민이요, 스스로 하는 민의 종합행동이 정치다.” 이런 의미에서 스스로 역사의 흐름과 질곡에서 자기 이성과 자기 행동, 자기 호흡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스스로라고 하는 책임성과 자발성, 자각은 역사적 혁명운동의 실천의 핵이다(함석헌, 위의 책, 73쪽).
그래서 함석헌은 “전체의 운동은 스스로 하는 운동이다. 자신(自新)하는 운동이다. 민중이 민중으로 속에서 깨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민중은 전체로서 깨어나야 한다. 혁명은 자성(自省)이자 자각(自覺)이다. 어느 누가 깨우침을 주는 것은 외부에서 안으로의 타율에 의한 각성이기 때문에 이미 스스로 하는 혁명이 될 수 없다. 스스로 하는 혁명이어야 타율에 의한 복제적·모방적 혁명이 아닌 창조적 혁명이 일어날 수가 있다. 여기서의 타율은 소수의 엘리트, 소수의 지식인, 소수의 권력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스스로의 관점과 스스로의 의식의 발현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시대를 다시 탈시대로서의 역량을 스스로 끌어내지 못하게 된다. 소수의 지식인을 신봉하는 시대, 소수의 엘리트의 혁명의식을 소비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민중은 하느님의 발꿈치, 나라의 발꿈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민중은 수난과 고통을 스스로 감수하면서 동시에 환희와 웃음을 생산해내는 주체이다(함석헌, 위의책, 73-74쪽).
이것은 결국 “국민성격 혹은 민족성을 개조”하는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는 기틀에 있다. 민중의 민중-됨이 없이 민족성을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민중 스스로 깨이지 않고 시대를 선도할 능력을 함양하지 않고서는 전체로서의 민족성격이 개조될 리가 만무하다(함석헌, 위의 책, 74쪽). 더욱이 “혁명은 악과 싸우는 일”이다. 물론 악의 잠재태나 현실태를 완전히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근본악은 인간 본성이기 때문에 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민족성, 자아개조가 이루어졌더라도 혁명의 가능성이 남아있게 된다. 하지만 악의 형태는 바꿀 수 있다. 악의 소멸은 불가능하더라도 악의 모습, 악의 세력, 악의 속도, 악의 이념 등은 끊임없이 바꾸어 가면서 새로운 민족성을 개조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함석헌은 민족성의 개조에 이르지 못한다면 혁명은 실패라고 단언한다. 또한 “역사상의 모든 죄악은 결국 민족적 성격이 결함이다... 자기를 인격적으로 무한히 발전시키자는 강한 욕망을 가지는 인간의 한 단체가 그 타고난 자연과 역상의 조건을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이용하여 자기 속에 본래부터 들어 있는 바탈을 실현해낸 것이 민족성이다.”(함석헌, 위의 책, 77쪽) 인간 현존재의 바탈을 실현하는 것이 민족성 개조다. 그 혁명의 속도야 어떻든 현존재의 바탈을 지배와 권력, 억압과 폭력, 강제와 비인간으로부터 탈(脫)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반드시 선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자아개조”이다.(함석헌, 위의 책, 78쪽) 먼저 자아가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민족성이 바뀌겠는가. 자아는 비인간적 구조, 권력중심적 구조, 무비판적 구조로부터 자신의 인식과 시간성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탈”(脫, 벗어남, 넘어섬)이다. 모든 지배로부터 시간에 앞서 가는 것, 앞서 보는 것, 앞서 말하는 것이다.
비인간성을 극복하지 못한 분열증, 서로의 마음이 감응하지 못하는 불감증은 모두 자아 개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족성 개조도 할 수 없는 정신적 무능력, 정신적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혁명운동의 자양분인 전체로서의 정신은 생각하는 힘, 성찰하는 힘으로서, 그것을 잃은 병리적 인간은 민중 스스로의 병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치료하고자 하는 의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다시 혁명을 위한 생각하는 힘과 성찰하는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함석헌, 위의 책, 78-79쪽)
*위의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혁명을 깨달은 자들의 노성(怒聲)
그 다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혁명운동의 가능 조건은 ‘조직’이다. 이 조직은 민중의 지혜, 민중의 힘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다. 함석헌은 “생명진화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정신 생활은 인간의 조직적 사회를 통해서 발달했다.”고 말하면서 ‘종교’라는 조직이 가장 높은 조직이라고 평가한다. 강제성이 없는 조직, 무형의 조직.(함석헌, 위의 책, 71쪽) 어쩌면 조직이라고 해서 일정한 집단적인 세력, 단합적인 힘의 행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직은 정신적 규합체, 정신적 공동체, 다시 말하면 정신의 총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민중의 정신이 모인 것, 그런데 그 이성적 모습, 그 에너지의 추동을 가능하게 해줄 매체가 종교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탈구조, 탈체계적, 탈모순적 혁명운동을 전개하겠다면서 되레 또 하나의 권력 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은 자체의 모순을 가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배적인 이성적인 인간은 권력 관계 속에서 자기를 구속하고 나아가 자기에 복종된 타인들도 구속한다.”(김진석, 초월에서 포월로, 솔, 1994, 105쪽) 그러므로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라는 조직은 아나키(anarchie)이다. “넓은 뜻의 아나키는 단순히 정부나 권력을 뿌리째 부정하는 데로 빠지지 않는다... 좋은 아나키는 오히려 넓은 비시대성 또는 탈시대성과 같이 가는 탈권력의 움직임이다.” 민중의 힘, 민중의 총체적 정신(전체 정신)은 늘 비시대성, 탈시대성, 탈권력이라는 점에서 아나키와 닮아있다. 그래서 조직을 통한 혁명운동(반란)은 “아름다운 놀이, 위험한 놀이”이다.(김진석, 위의 책, 17쪽)
마지막으로 혁명운동의 가능 조건은 ‘이론’이다. 이론은 혁명운동의 주도 인물과 조직과의 연관성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그러면서도 민중 정신의 모음이다. 민중 정신이 하나로 모인 것, 하나가 되도록 하는 정신, 그것이 이념과 이상이 될진대 그것의 근본적인 실체와 의미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이론이 되겠다. 다시 말해서 이론의 밑바탕은 민중을 하나 되게 만드는 정신적 실체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혁명운동을 하는 데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민중의 자기 의식, 민중을 자각하게 만드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고서 혁명운동을 한다는 것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민중의 의식 저변에 흐르고 있는 행동의 규범, 행동하게 만드는 강한 의지와 동기는 민중 스스로에 의해서 각성된 정신에서 나온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운동은 나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적 총합체의 공동 구성원인 타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타자와 더불어 만들어 가는 혁명운동이기 때문에 타자는 반드시 공통되고 합의가 이루어지는 대화적 사고의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타자가 가진 정신(geist)은 무엇인가, 타자의 혁명운동의 시대적 정신은 어디에 기반하는가를 정신적으로 교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운동의 시대착오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함석헌은 그 이론[理]을 자기 깨달음, 세계관, 인생관이라고 말한다. 자기를 볼 수 있는 눈, 타자를 볼 수 있는 눈, 세계와 인생을 볼 수 있는 눈, 다시 말해, 봄의 철학적, 봄의 직관적, 봄의 감성적 바탕이 곧 혁명운동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함석헌, 앞의 책, 71-72쪽).
그래서 함석헌은 “전체의 운동은 스스로 하는 운동이다. 자신(自新)하는 운동이다. 민중이 민중으로 속에서 깨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민중은 전체로서 깨어나야 한다. 혁명은 자성(自省)이자 자각(自覺)이다. 어느 누가 깨우침을 주는 것은 외부에서 안으로의 타율에 의한 각성이기 때문에 이미 스스로 하는 혁명이 될 수 없다. 스스로 하는 혁명이어야 타율에 의한 복제적·모방적 혁명이 아닌 창조적 혁명이 일어날 수가 있다. 여기서의 타율은 소수의 엘리트, 소수의 지식인, 소수의 권력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스스로의 관점과 스스로의 의식의 발현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시대를 다시 탈시대로서의 역량을 스스로 끌어내지 못하게 된다. 소수의 지식인을 신봉하는 시대, 소수의 엘리트의 혁명의식을 소비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민중은 하느님의 발꿈치, 나라의 발꿈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민중은 수난과 고통을 스스로 감수하면서 동시에 환희와 웃음을 생산해내는 주체이다(함석헌, 위의책, 73-74쪽).
이것은 결국 “국민성격 혹은 민족성을 개조”하는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는 기틀에 있다. 민중의 민중-됨이 없이 민족성을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민중 스스로 깨이지 않고 시대를 선도할 능력을 함양하지 않고서는 전체로서의 민족성격이 개조될 리가 만무하다(함석헌, 위의 책, 74쪽). 더욱이 “혁명은 악과 싸우는 일”이다. 물론 악의 잠재태나 현실태를 완전히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근본악은 인간 본성이기 때문에 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민족성, 자아개조가 이루어졌더라도 혁명의 가능성이 남아있게 된다. 하지만 악의 형태는 바꿀 수 있다. 악의 소멸은 불가능하더라도 악의 모습, 악의 세력, 악의 속도, 악의 이념 등은 끊임없이 바꾸어 가면서 새로운 민족성을 개조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함석헌은 민족성의 개조에 이르지 못한다면 혁명은 실패라고 단언한다. 또한 “역사상의 모든 죄악은 결국 민족적 성격이 결함이다... 자기를 인격적으로 무한히 발전시키자는 강한 욕망을 가지는 인간의 한 단체가 그 타고난 자연과 역상의 조건을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이용하여 자기 속에 본래부터 들어 있는 바탈을 실현해낸 것이 민족성이다.”(함석헌, 위의 책, 77쪽) 인간 현존재의 바탈을 실현하는 것이 민족성 개조다. 그 혁명의 속도야 어떻든 현존재의 바탈을 지배와 권력, 억압과 폭력, 강제와 비인간으로부터 탈(脫)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반드시 선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자아개조”이다.(함석헌, 위의 책, 78쪽) 먼저 자아가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민족성이 바뀌겠는가. 자아는 비인간적 구조, 권력중심적 구조, 무비판적 구조로부터 자신의 인식과 시간성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탈”(脫, 벗어남, 넘어섬)이다. 모든 지배로부터 시간에 앞서 가는 것, 앞서 보는 것, 앞서 말하는 것이다.
*위의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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