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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민중 전체의 생각(지금은 혁명 중)

by anarchopists 2019. 10.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9/19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민중 전체의 생각(지금은 혁명 중)



말은 도대체 무엇을 내보는 것일까? 말은 단순히 소리를 내뱉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말은 소리 이외에 무엇을 전달한단 말인가? 뜻이다.
함석헌에 의하면 말은 뜻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52쪽) 이는 들뢰즈가 “말하는 자는 항상 타자, 즉 자신이 말함으로써 점유하게 되는 대상들의 ‘소유주’이다.”(Gilles Deleuze, 이정하 옮김, 소진된 인간, 문학과지성사, 2014, 34쪽)라고 말한 말의 뜻 점유나 대상을 소유하는 자로서의 말과는 전혀 다르다. 뜻을 발생시키고 사건을 발생시킨다고 해도 말을 하는 자는 타자를 소유할 수 없다. 함석헌에게 있어 말은 정신이자 물질이요, 역사이자 계시이다.(함석헌, 앞의 책, 52쪽) 그런 의미에서 말은 말하는 자의 소유가 아니라 사건이다.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뜻이 발생되는 지점에서 실존은 변하고 세계는 운동을 한다.


“시대의 말씀은 전체의 말씀이요, 참의 음성이요, 하느님의 뜻이다... 시대의 말씀은 민중의 입에서 나와야 한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다.”(함석헌, 위의 책, 53쪽) 말은 민중의 입을 통해서 나올 때 역사가 된다는 뜻이리라. 민중은 전체를 생각하고 전체로서의 민중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들뢰즈가 “신은 근원적인 것, 아니 모든 가능성 전체”(Gilles Deleuze, 앞의 책, 24쪽)로 본 것처럼 모든 가능성으로서의 초월자의 뜻은 가능성으로서의 전체요, 민중 전체를 위한 가능성으로서의 뜻을 내뿜는다. 그래서 민심이 천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변화 가능성 전체, 혁명 가능성 전체는 민중이 가지고 있으며, 그 가능성의 실현은 하늘의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민중이라고 해서 맘대로 혁명을 하거나 세계 변화의 가능성을 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말, 초월자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하늘의 뜻인 사랑을 품어야 한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근본 원리와 원칙, 그리고 동기는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만이 편협하게 내 편 네 편을 가르지 않고 전체를 아우를 수 있다. 사랑을 통해서만이, 사랑에 의해서만 모든 것이 전체 속에서 하나가 되고 통할 수 있는 것이다(함석헌, 앞의 책, 56쪽)


시대의 변화를 끌어내는데 전체를 앞세우지 않고 사적 개인만을 생각할 경우에 너와 내가 전체 속에 흡수될 수가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전체가 혁명과 시대 변화의 명분이다.
한 개인의 아픔과 고통, 억압 때문에 혁명과 변화를 기획했다면 그것은 그 개인이 굴욕과 수모 때문에 일어나야 한다. 민중 전체를 제도로서 구속하겠다면 혁명을 해야 한다. 제도보다 우선하는 것이 민중이요, 그것도 민중의 삶과 생명인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57쪽) 민중의 삶과 생명은 어떤 국가나 제도에게도 양도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민중의 삶과 생명은 전체로서의 삶이고 전체로서의 뜻이다. 따라서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잘못의 근본 원인은 너, 나를 갈라 생각하는 데 있다. 나라는 너 나 생각이 없고, 너도 ‘나’라 하는 데 있다. 모든 것을 ‘나’라 하는 것이 나라요, 나라하는 생각이다.”(함석헌, 위의 책, 60쪽)


‘나’라는 개인의 실존이 덩어리가 된 것이 ‘나라’가 되었다는 그의 논리에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이 너라고 하는 실존까지도 아우르면서(포섭)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는 연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타자인 ‘너’가 ‘나’와 완전히 동일하다는 전체주의나 동일주의와는 다르다. 전체를 생각하고 전체와의 상관성 속에서 존재하는 거대 실존(집단 실존)과 개인 실존의 실재적 필연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집단으로서의 실존 역시 매순간 직면한 상황들 속에서 결단하고 전체를 위해서 개별 실존을 어떻게 품을 것인가를 갈등, 고민, 긴장해야 한다. 집단 공동체의 생명이 거기에 있는 바, 집단 실존의식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의 실존도 역사적 실존과 사회·역사적 노동실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 실존의 첫 단추가 자기 초월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퐁주(F. Ponge)의 말을 인용하여 “인간은 인간의 미래”라고 말했다시피, “인간은 만들어가야 할 존재”, 자기 초월적 존재이다.(Jean-Paul Sartre, 박정태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학사, 2007, 65쪽) 현재의 인간을 부정하고 미래의 실재적 가능 존재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 인간은 계속 자기를 부정하고 현재를 넘어서야 한다. 그는 불완전한 존재요 고정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직 인간이 아니다. 그는 계속 자신의 고착화된 존재 규정과 싸워야 한다. 그것이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인간 자신을 특정한 계급이나 지위에 세우려는(차지) 의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거부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초월이요 자기 부정이다. 그런 인간이 혁명을 할 수가 없다. 정신과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하는 의지에 자기 헌신과 자기 생각을 실현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의지와 계급과 싸워야 하는 인간의 초월을 실패한다면 진정한 혁명가라 자부할 수 없다(함석헌, 앞의 책, 66쪽).


이와 같은 모순된 사유와 행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이다. “생각이 터져 나온 것이 혁명”이기 때문이다.(함석헌, 위의 책, 67쪽) “민중을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민중 속에서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현상과 맞서 싸우는”(Jean-Paul Sartre, 앞의 책, 82쪽) 올바른 생각, 환상을 엎어버리는 생각이 객관적인 정신, 절대정신이 될 때 혁명이 일어나는 법이다. 생각 없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생각을 기반으로 하는, 문제의식이, 정신 덩어리가 이데올로기의 특수주의와 싸움으로써 혁명이 될 수가 있다. 생각은 혁명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계기이다. 혁명은 민중이 주체적인 사유의 자유가 있다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민중이 혁명을 한다는 것은 이미 정신의 무르익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 정신의 반성적 사유 역시 모든 민중을 위하여, 전체를 위하여 해야 한다. 민중이 생각한다는 것은 민중만이 아니요 역사적 실존 전체가 생각하는 것이요, 민중이 행동을 한다는 것은 민중의 인간화, 민중의 전체가 행동하는 것이다. 전체를 위해서만이 선이고 정의이고 참 행동, 참 감정이다.(함석헌, 앞의 책, 67-68쪽)


인간이 실천적 타성과 의식의 식민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사유의 위험과 모험 속으로 자신을 내던져 다시 민중으로 돌아와야 한다. 인간, 곧 민중 자신이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 생각을, 정신을 재생산해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68-69쪽). 혁명은 다시 돌아감(revolution)이다. 모든 이데올로기, 눈앞에 보이지 않는 억압의 세계, 계급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민중이 서야 할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거기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인간화를 역사에 내재화하는 것이 민중의 과제이다. 옛말에 권토중래(捲土重來)라고 했다. 흙먼지를 날리며 다시 온다. 즉 한 번의 실패에 굴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난다는 뜻이다. 민중이 그런 존재다. 민중은 다시 본래의 자기를 생산하려고 한다. 설령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민중 현존재의 혁명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전체로서 세계에 드러낸다.


민중은 자기를 전체로 파악하고 이 세계를 전체로 인식한다. 전체는 계급이나 이데올로기가 없다. 민중은 전체로서의 세계 현존재일 뿐이다. 민중이 말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실존의 목소리가 아니다.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진 것을
세계 내에서 전체화하려고 하는 보편적 실존이다. 그 보편적 실존의 생각이 혁명을 가져온다. 민중 고유한 삶을 소외시키고 사물화하는 모든 것을 저항하기 위해서 “삶은 모든 것의 근본이며 또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이기 때문”(Jean-Paul Sartre, 앞의 책, 155쪽)이다. 더 나아가서 하버마스가 말한 실체화된 권력의 지배로부터 의식을 해방시키려는 관심(해방적 관심)(전재원, 로고스와 필로소피아, 경북대학교출판부, 2014, 169쪽)이라 말할 수가 있다. 이에 함석헌은 말한다. “너는 깊이 생각하라.”(함석헌, 앞의 책, 70쪽)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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