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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상호주관적 도덕 공동체와 시대적 참뜻-말

by anarchopists 2019. 10.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9/11 21:46]에 발행한 글입니다.


상호주관적 도덕 공동체와 시대적 참뜻-말



최근 들어 국가 공동체에 대한 회의가 심해지고 있다. 국가 공동체가 과연 민중의 살림, 민중의 생명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함석헌은 이미 국가 공동체에 대한 좀 더 근원적인 해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국가에 대한 정의는, ‘악과 투쟁하는 공동체’로서 규정된다. 국가, 함석헌의 정확한 표현에 의하면, 나라는 악에 대항하는 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민중의 재산과 안녕과 질서를 보장(담보)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함석헌은 그것을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보다 나라가 공동체라면, 개별적 민중 하나 하나는 도덕적 존재,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라는 도덕적 존재들이 모여서 구성한 집단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도덕적 존재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윤리”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42쪽). 상호주관적 윤리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데서 도덕적 공동체가 시작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도덕 공동체, 상호주관적 윤리 공동체는 타자를 윤리적으로 인식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한다.


따라서 나라는 단순히 민중의 재산이나 보호하고 안녕과 질서를 유지시키는 도구적 행위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선다.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가 어떤 의식과 행위를 해야 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것을 민중에게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행위자 혹은 정치적 행위 가능자에게까지 해당되는 강한 주체 인식과 행위를 요청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을 모든 행동의 표준을 삼고 살고자 하는 것이 윤리”라고 주장한다. 분명히 나라는 유기체이며 동시에 윤리 공동체, 사람 노릇을 하는 공동체이다(함석헌, 위의 책, 42쪽).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함석헌이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도덕적·윤리적 공동체의 범위는 일개 나라를 초월하여 범국가공동체, 세계운명공동체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43-44쪽). 그런 의미에서 세계 국가는 기능적 명령이나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륜 공동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개별적인 국가들은 이기적인 삶을 실현하지 않고 국가 이기적인 삶의 내용을 넘어서 도덕적 인간을 토대로 물질적 실존을 소외시키거나 파괴하지 않으면서 상호주관적 민족 공동체의 분열을 지양하고 추상적 인간의 실존을 공적 도덕성으로 묶는 역할을 수행한다(J. Habermas, 이진우 옮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출판사, 1994, 86쪽).


이러한 도덕적 실존, 윤리적 공동체를 바탕으로 통일을 생각해보면 경제적 우월성, 경제적 성장을 통한 국가의 통합보다 “정신”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정신으로 국가 공동체의 의식이 고양되어 있어야 경제적 삶, 경제적 부흥도 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신으로 통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력이나 폭력은 있을 수가 없다. “비폭력혁명으로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함석헌, 앞의 책, 45쪽). 비폭력은, 하버마스가 말한 것처럼, “시적-조물주적”이다. 그것도 “역사적 진리들의 조물주적 작품화”이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개인들의 실천이라는 혁명적 기획투사”(J. Habermas, 앞의 책, 371쪽)라고 말할 수 있다. 통일은 흡수통일이라는 폭력적, 허구적인 힘으로서도 아니요, 경제적 자만을 통한 차별적 우위로 혁명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경쟁적 통일 지평일 뿐이다. 통일과 삶은 강자도, 약자도,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체”를 위한, 전체가 주체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함석헌, 앞의 책, 46쪽). 모두가 원하는 삶, 모두가 원하는 혁명, 모두가 원하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함석헌은 비폭력적 통일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립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꿈꾼다. 앞에서 말한 우승열패의 허구적 삶이나 경쟁을 통해서 불평등적 생활세계가 등장하는 것을 비판한다. 하나의 생활세계, 하나의 소통되는 세계, 하나의 공통된 일상실천이 가능한 세계, 서로 돕는(상호부조의 철학) 세계, 상호 참여가 가능한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원리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에서 나온다. 자기희생 없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세계적 실천, 즉 비(무)경쟁성, 비(무)지역성, 비폭력성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함석헌, 위의 책, 47-48쪽).


거듭 말하지만 비폭력주의는 경쟁이 아닌 자기희생이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좋은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49쪽).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의 구현이다. 평화는 사회정의의 실현, 인권의 옹호와 확대, 궁핍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이에 반해 평화 없음(peacelessness)은 기아, 영양실조, 질병, 환경오염 등이다. 인간과 자연, 세계에 가하는 폭력적 행위는 평화 없음의 상태로 치달을 수 있다. 개인 간의 경쟁, 국가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경제적 부를 향유하기 위해서 자연을 희생시키는 것 역시 평화 없음의 파괴적 현실로 치닫게 된다. 그러므로 “진출, 확장, 정복, 지배, 순치, 주입의 시스템”이 아니라 “경청, 배움, 섬김, 자율, 상생, 평화를 위한 우정과 연대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박성준, “인문학의 희망, 우정의 공동체를 열다”, 장동석 지음, 살아있는 도서관, 현암사, 2012, 137-144쪽). 이 모든 행위들 속에서는 물론 생활세계적 삶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의 이성적, 의사소통적 간섭, 상호이해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것의 타당성의 요청은 관념으로만 되지 않는다. 의사소통적 합의는 평화와 비폭력을 추구하는 참여자들의 의지와 조정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J. Habermas, 앞의 책, 375쪽).


이렇게 적극적인 평화와 비폭력의 철학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타당한 말(씀)을 가져야 한다. 함석헌은 “그 말(씀)이 그 시대의 뜻”이라고 말한다(함석헌, 앞의 책, 51쪽). 시대가 원하는 뜻을 통해 세계를 해명하고, 공존재적 삶을 만드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언어, 즉 뜻이 있어야 한다. 뜻이 없으면 시대도 없다. 시대를 가리키고 시대를 선도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변함은 변하지 않는 것의 스스로 나타냄이다. 그러므로 역사에는 시대가 있고 시대는 제 말씀을 가진다.”(함석헌, 위의 책, 51쪽)고 설파한다. 이 말은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할 뿐, 정지된 것은 없다(panta rhei)는 마치 고대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를 연상시킨다. 그는 변화 속의 어떤 단일성을 상정하고 현상의 배후에 대립되는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만물은 투쟁, 대립하지만 참되고 유일한 법칙 곧 로고스(logos)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보았다(강성률, 서양철학사 산책, 평단문화사, 2009, 16-19쪽, Hans J. Störig, 세계철학사(상), 분도출판사, 2004 참조). 역사도, 시대가 변하지만 그 현상 이면에 불변하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뜻이 되어 역사와 시대를 지탱하는 것이다. 자람과 생명은 연속이고 쉼이 없다. 변화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초월과 역사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으려는 어떤 의지적인 힘이다. 생명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H. Jonas)는 이것을 유신론적 존재론으로 풀어간다. “본능과 불안, 쾌락과 고통, 승리와 포기, 사랑 그리고 심지어는 잔인함이 예리하게 언제나 증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강도가 압박해 오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경험 자체가 압박해 오고 있다는 사실은 신적인 주체에게는 성취를 의미하며, 수없이 반복되면서도 결코 무감각해지지 않고 인내하며 꾸준히 살아가는 삶은, 이미 이 때문에 죽음과 새로운 탄생의 필연성은 성숙한 본질을 마련해 준다. 그리고 신성은 이 성숙한 본질을 바탕으로 자신을 쇄신시키는 본질을 형성해 간다. 이 모든 것들은 놀이의 순전한 찬란함과 박차를 가하는 엄격함에 의존하면서 진화를 도구로 사용한다.”(H. Jonas, 한정선 옮김, 생명의 원리, 아카넷, 2001, 508쪽).


거의 같은 맥락에서 함석헌은 생명 그 자체와 영원성 혹은 초월자의 존재를 이렇게 표현한다. “산 것은 자라는 것이다. 참이나 완전은 생각하는 데 자란다는 생각은 빼고는 바로 되었다 할 수 없다. 하느님은 있는 이라기보다도 영원히 있으‘려’는 뜻이다. 영원의 미완성이다. 그 무엇이‘려’ 하는 데서 영원이 나오고 또 무한이 나온다... 생명은 변하지 않는 것, 변하지 않기 위해 변하는 것이다. 많으면서도 하나인 것, 많으므로 하나를 나타내는 것이다.”(함석헌, 앞의 책, 52쪽)


로고스는 말인 동시에 뜻이다. 변화하지만 변화 속의 변화하지 않는 본질적인 것으로 모든 현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현상을 설명하려면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현상이 변한다고 해서 현상 이면의 것, 본질적인 실체까지도 변한다고 볼 수 없다. 다만 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말은 변하는 현상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그것을 해명하고 뜻과 의미지평으로 확정짓는다. 그 현상과 더불어 나타나는 말은 그렇게 변하는 현상 속에 실려서 역사의 지평과 함께 흘러가지만 뜻, 혹은 말은 변하지 않는 영원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이 많은 듯하지만 하나이고 하나인 듯하지만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수많은 현상은 결국 하나의 실체에서 파생되거나 분화된 것이고 또 그 현상들은 하나의 실체에서 연원된다. 달리 말하면 화엄사상의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함석헌이 지칭하는 말은 영원=로고스=초월자=생명과도 같은 의미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이 가식과 포장이 되지 않고 진정성을 담은 말이 되고자 한다면, 말은 영원성과 초월성을 담지하고 있
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설령 사태가 변한다 하여도 말의 진정성마저도 변한다면 말(씀)을 통한 의사소통과 비폭력을 통한 통일은 요원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정치언어니 일상언어니 서민의 언어니 시정잡배의 언어니 구분을 하지만 그 언어의 밑바탕에는 참 뜻만이 존재해야 한다. 참뜻을 전달하지 못하는 언어는 죽은 언어나 다름이 없고 언어 이면의 초월의 뜻이 성립할 수 없으니 말의 순수성이나 말의 진중함과 신중함조차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언어(言語)가 기능적으로 사람의 소리[言]와 함께 나의[吾] 말[言]을 통해서 생각을 전하는 매개체일지라도, 말은 본질적으로 참뜻의 교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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