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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박태순 제2강] 함석헌- 지성소의 언어와 세계성의 탐험

by anarchopists 2020. 1.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5/11 09: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
지성소(至聖所)의 언어와 세계성의 탐험


나는 시인이 아니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 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 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 다 바칠 뿐이다("수평선 너머", 「머리말」).

함석헌의 시집 "수평선 너머"는 1953년 3월 피난지 부산에서 처음 발간되었다가 절판되었는데 한국사회가 4.19와 5ㆍ16으로 요동치던 1961년에 개정판이 나온다. 그가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8.15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였다고 한다. 쉰 날(50일) 동안 신의주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썼던 옥중시 300여 편을 모아 ‘쉰 날’이라는 제목의 육필시집을 꾸몄는데, 월남을 하는 도정에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유실되고 말았다 한다. 6.25전쟁의 피난 생활 와중에도 그는 줄기차게 시를 쓰면서 농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 나섰는데 전국의 청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그가 쓴 시들을 등사하여 열독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집 「머리말」은 그의 시정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솔직담백하게 진술하고 있는데 그 자체로 특성 있는 문학론이자 시론으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는 전업작가로서의 시인을 자신의 시 창작에서 거부하고 있다. 이는 3.1운동 직후의 신채호의 문학주의 문학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킨다. 의사ㆍ미술ㆍ교육ㆍ농부ㆍ역사ㆍ"성경" 연구 등에 두루 몰입되어왔음을 밝히면서 얼핏 자기 비하발언을 하고 있는 듯싶지만, 실은 정반대이다.
절대가치를 찾기 위한 기나긴 고난의 도정, 종교인으로서 ‘천로역정’과도 같은 줄기찬 영혼의 편력 끝에 마침내 다다른 궁극적인 경지를 알리고자 한다. 그것은 그냥 지고지순의 높은 차원이 아니라 ‘성령의 언어’로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지성소’의 신비스러운 체험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시는 결코 세속적인 언어의 주택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 다 바칠 뿐이다’라는 결론 부분의 문장에서 그가 시 창작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작가-작품-독자의 만남을 통상적으로 문학이라 하지만, 그는 이를 부인한다. 그는 독자를 설정하지 않는다. 내 맘에 칼질을 한 것이 그의 시문학의 출발지가 되고 님 앞에 다 바칠 뿐인 것이 그 시문학의 도착지가 된다면 이는 절대경지에서 이루어지는 절대문학의 완성이 된다. 오도송(悟道頌)의 차원이 아니며 그보다도 윗길로 올라간, 비유컨대 불립문자 유형으로 이루어지는 ‘진실문자’의 난해한 표현이 되고, 표층구조로 드러낼 수 없는 심충구조를 비상수단의 방법으로 드러내는 미학표현의 시어가 된다.

1950년대의 무질서와 혼란, 지식인사회의 천박한 학문수준과 곡학아세의 구조 속에서 시인 함석헌의 시문학은 돌연하기도 하고 당돌하기도 하다. 절망의 상황을 비밀 코드의 희망 언어로 돌파하려는 그 자신의 인간혁명 결단과 각오를 읽을 수 있다. 그 출발은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만의 천상천하 문학이고, 득의환희의 비밀암호 문학이다.

시인 고은이 “모든 문인은 그 개개인으로서 이미 독립정부인 것”이라고 했지만, 함석헌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었다. 시인 함석헌이야말로 세속적인 문학행위의 시문학 아니라 하나님의 성스러운 역사(役事)로서의 시문학이었다. 이 역사를 어찌 전달할까 고심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시 언어는 문학주의 문학과는 달리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따름이다. 그는 언어를 믿지 않으려 하지만 그의 절대체험을 실어낼 수 있는 다른 표현 방도가 없기 때문에 시의 언어를 채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논리적인 문장이나 학술적인 설명방식 따위보다는 시의 언어가 더 진솔하고 진실하다고 시의 표현법을 승인해주려 하는 것이다.(박태순 내일 계속)


이글은 지난 4월1일
<함석헌탄신 108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을
다시 실었습니다.
박태순님은 소설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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