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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김조년 제9강] 평화-비폭력 화합, 그리고 영원한 혁명

by anarchopists 2020. 1. 3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3/28 08:57]에 발행한 글입니다.


시대의 낌새와 소리
평화: 비폭력ㆍ화합, 그리고 영원한 혁명

좋은 일은 혼자하는 게 아니고 함께 한다.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 과학적 요청, 현실적 요청: 핵무기, 경제문제, 삶의 질 향상문제를 염두에 둔다.
평화를 깨는 요소들을 함석헌은 1) 국가주의->국가지상주의->정부지상주의로 본다. 그렇다면 누가 평화를 깨는가? 평화의 적들은 국가주의 안에서 활동하는 1) 대국정치가들, 2) 독점기업가들, 3) 약소국 정치가들, 그리고 4) 씨 속에 있는 폐쇄성과 배타성이다.

이 중에서도 씨알속에 있는 폐쇄성과 배타성을 가장 큰 문제로 본다. 씨알이 깨어 있다면, 성숙된 씨알이라면 다른 것들은 다 극복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씨알은 평화요, 평화는 씨알에 있다”(12: 281)고 보기 때문이다. 씨알은 세 개의 나라에서 산다. 나라 살림은 씨알이 본질을 어떻게 사는가에 달려 있다.

세 개의 나라가 있다.
“하나는 하늘나라요 하나는 마음의 나라다. 그러나 또 누구나 다 잘 아는 다른 한 나라가 그 중간에 있다. 눈에 뵈는 이 세상 나라다. 우리는 모두 세 세계를 살고 있다. 극대의 나라, 극소의 나라, 중간 나라. 물질계를 보는 데 눈ㆍ망원경ㆍ현미경의 세 눈이 있듯이, 정신계에도 세 눈이 있어야 한다. 영원ㆍ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의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그런데 이 여섯 세계에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화는 곧 조화, 고름인데 고르게 되지 않고는 세계가 서갈 수 없다.

안ㆍ밖ㆍ생ㆍ무생을 말할 것 없이 복잡한 힘의 얽힘인데 그 얽혀 작용하는 것이 어느 고른 상태에 이르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그래서 있다. 하나의 질서 잡히고 법칙 있는 세계가 된 다음에야 우리가 능히 생각하고 알고 교섭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기 전은 설혹 상상한대도 혼돈ㆍ어지러움ㆍ허무ㆍ두루뭉수리밖에 없다. 우리가 있을 때, 알 때, 나일 때는 벌써 거기 세계 곧 질서ㆍ코스모스ㆍ대조화ㆍ평화가 있었다. ‘화(和)는 천하지달도(天下之達道)다’. 그러므로 화는 알파요 오메가다. 다른 말로 하면 평화는 구경의 원리인 동시에 또 내재의 원리다.”(
12: 281)

부드러워짐, 순수해짐으로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닦고, 다스리고, 이기고, 다듬는 것이다. 실과 쇠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단련을 통하여 부드러워진다.

“사람의 정신도 그렇다. 깨끗하고, 굳세고, 날쌔기도 하지만 또 부드럽지 않으면 안니 된다. 노자가 허(虛)와 정(靜)과 유(柔)와 겸(謙)을 권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12: 280) 이것을 실현하는 삶의 한 길을 함석헌은 간디에게서 발견한다. 곧 비폭력 저항과 비폭력 평화의 삶이다.

인간이 아직 깨지 못했을 때까지는 전쟁은 자연의 법칙으로 알았다. 그러나 문명된 사회의 전쟁은 법칙이 아니라 지배자들이 일부러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현대문명의 전쟁산업은 전쟁의 무의미성을 선언한다. 설혹 싸운다 하더라도 폭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싸움은 정신의 힘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을 간디가 보여주었다. 그것이 비폭력저항의 길이요, 조직된 사랑의 표현이다. 간디는 비겁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비범한 통찰력으로 겸손하게 일을 하였다.

그는 좋은 일을 혼자서 하지 않고 친구들과 상의하여 공동으로 펼쳤다. 그렇게 공동으로 진리를 실현하는 자세로 생활하였다. “간디의 길은 참의 길이기 때문에 아무 꾀나 술책이 없다. 선동이나 선전도 없다. 비밀이 없다....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길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길이 그 길이다.”(7: 11) 그러나 간디의 길은 새 길이 아니라 옛길이었다.

“맨 처음부터 있는 길이다. 공자의 길이요, 석가의 길이요, 예수의 길이다. 그러므로 간디는 자기의 혁명은 곧 맨 처음의 원리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예부터 있은 길, 누가 낸 것 아니요 저절로 있는 자연의 길, 하나님의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그로 말미암아야 한다는 것이요, 또 할 수 있다.”(7: 15) 그러나 그것은 새 길이다.

전에 누구도 그 길을 걷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라, 자기를 희생하라는 것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단체로서, 나라로서 해보려고 하였다는 점이 새 길이라는 것이다. 간디는 이것을 집단으로, 조직으로, 나라로 해 보았기에 ‘현대의 조명탄’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혁명-역사의 주체로 살자
낌새를 안다는 것은 감추어진 것을 찾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공개된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석가, 노자, 장자, 소크라테스, 공자와 같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드러내놓은 비밀이다. 특히 예수의 삶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비밀이다. 그러나 그 비밀은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다. 드러나 있지만 감추어진 사건이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길이 다양하고, 그를 보는 눈이 아주 많으며, 그를 해석하는 방향이 너무 많다. 그것이 또 하나의 신비요 드러내놓은 비밀이다.

그는 혁명가였으나, 그이의 혁명은 한 가지로 해석할 수가 없다. 그 혁명을 따라가 보자는 것이 함석헌의 삶이었다. 생명살이로서의 삶은 끝없는 혁명이다. 우리는 그 혁명의 삶을 일상으로 살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아마도 그것이 궁극존재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요 과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혁명의 과제는 무엇일까? 평범한 삶으로서의 혁명은 어떠한 것일까? 삶을 혁명하고, 혁명을 생활화하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시대의 낌새를 눈치 챈다는 것은 그 시대에 나타나는 사건들의 뜻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역사사건의 뜻을 깨달음이다. “역사적 사건의 뜻을 깨달음은 불덩이를 삼킴이요 올가미를 벗기는 것이다.”(14: 109) 불덩이란 가장 고통스러운 것, 버릴 수도, 삼킬 수도 없는 그것을 말한다. 그러나 버리지 않으면 언제나 문제로 남아 있어 항상 또 다시 등장할 일이지만, 삼켜버리면 끝난다. 그러나 불덩이를 삼킬 때는 목이 타고 속이 뒤집혀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뜻을 알았다면, 그것을 알아차리려면 목에 걸린 불덩이를 삼키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의 고난은 우리가 택한 것이다. 고난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져오는 사건을, 일을 우리가 택했단 말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어쩔 수 없이 받을 수밖에 없고, 감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저주인가? 은총인가? 그 자체는 저주도 은총도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저주와 은총으로 갈린다. 그것의 낌새를 알아차리면 은총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저주로 남아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혁명으로 가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을 밝히는 빛, 제 속의 빛을 찾는 것이요, 그것이 빛으로 내비칠 때 촛불이 되고, 횃불이 되고 봉화가 된다. 이 때 혁명의 불길은 타오른다. 결국 혁명은 속 빛이 타오르게 되는 일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그가 붙들고 씨름하였던 문제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그대로 해결점을 찾기를 기다리고 있다.

성숙한 씨알이 되자는 것,
생각하는 씨알이 되자는 것,
민족의 통일을 이루되 평화롭게 하자는 것,
너와 내가 하나로 같이 살자는 것,
깊은 철학을 낳고, 새종교를 낳자는 것,
언로를 트기 위하여 언론의 게릴라전을 펼치자는 것,
썩어지는 씨알이 되자는 것,
국민정신을 살리자는 것,
자기혁명, 씨알혁명을 하자는 것,
역사의 주최로 살자는 것,
영원한 혁명: 하늘과 땅과 사람을 통합하는 대인(大人)이, 그리스도요 하느님이 되자는 것,

이 화두는 아직도 우리가 씨름해야 할 문제로 오롯이 남아 있다.
일일이 무엇을 더 말하랴?! 민중, 씨의 선택은 언제나 유동ㆍ역동을 가진다. 타락과 회개의 양 언덕을 오고간다. 타락에서 선택한 길은 회개로 회복하고, 회개에서 온 오만의 선택은 다시 타락한다. 이렇게 하여 영원히 되어감이 역사요 인생이다. 그래서 멀리, 널리, 크게 보고 가자는 것이다. 생명과 평화의 길로 멀리 보고 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에 몰입되어 사는 것도 아니다. 현실 속에 들어 있는 영원성을 찾자는 것이요, 영원을 향한, 궁극존재를 향한 현실의 당당한 발걸음을 찾자는 것이다. 내 그 길을 가는 것, 아니 내가 그 길이다 선언하는 것이다.

최근의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과 불만은 누가 자초한 것인가?
그들의 원래 천박한 상태에서도 연유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속아서 그들을 뽑아준 이 씨알들에게 있다. 그들은 물질주의, 현금(現今)주의, 출세주의에 눈이 멀어, 그것을 이용한 정치꾼들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유혹은 자기유혹이지, 남이 유혹하여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욕심은 제 욕심에 걸려 넘어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하여 그대로 손 개얹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지극히 무책임한 일이다. 인생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는 데 의미가 있다. 그것이 회개다. 집단회개요 성찰이란 말이다.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는 것은 자신을 다시 바로 세움이다. 잘못한 것을 다시 바로세우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새로운 것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선거에 의하여 당선된 정부가 추진하는 일제고사, 언론법, 부자감면, 사대강개발(운하), 금산분리완화, 남북교류냉각화 등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고 뭉치고 행동해야 하는 근거가 충분히 발견된다.


김조년 선생님은
■ 김조년 선생님은 현재 한남대학교 사화복지학과(사회학) 교수로 계신다. 함석헌 선생님과 많은 교류를 하시고 함 선생님이 서거하신 뒤에는 “함석헌기념사업회” 감사,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등을 맡고 계신다. 그리고 한남대학교에서 '함석헌과 한국사회'란 제목으로 사이버강의를 개설하고 있으며. 격월간 “표주박통신” 주필을 맡고 계신다.
■ 그 외 자본주의 대안운동으로 “대전민들레의료생활협동조합” 이사장, “대전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전 공동의장)을 맡고 계신다.
■ 저서로는 “사랑하는 벗에게”, “성찰의 창문으로 바라본 세상”, “평상의 편지”, 카토 본트여스 판 베에크, “그래도 내 마음은 티베트에 사네”(번역본) 등 다수가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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