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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어록 365일

믿음은 민중-주체인 나를 믿는 데서 출발합니다!

by anarchopists 2021. 1. 23.

1. 믿음은 민중-주체인 나를 믿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못하더라도 어려움을 당할 때에 서로 알아주는 마음만을 가지고 싶습니다. 씨ᄋᆞᆯ의 소리는 그것 하잔 것입니다. (…) 사람은 결코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 사람의 입 내놓고 어디 따로 하나님의 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을 나와 꼭 같은 사람으로 알고 인격적으로 대접해 주는 사람의 입이 곧 하나님의 입입니다. (…) 씨ᄋᆞᆯ 여러분, 아무리 괴로워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럴 듯이 말해도 속지 마십시오. 벼슬아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젠 신문도 못 믿습니다. 신문이 우리 사정 알아주지 않습니다. (…) 이제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들 자신밖에 없습니다. 우리끼리 부족이 있어도 서로 믿고 잘못이 있어도 큰 목적 때문에 서로 용서하고 고생을 당할 때에 서로 알아주어서 서로 격려하고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그래야 겉으로 약해도 속으로 알이 듭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8, 씨ᄋᆞᆯ에게 보내는 편지, 한길사, 1984, 12-13).

 

믿음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참 좋습니다. 한자어로 신(信)을 쓰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 상호 이성과 감정을 전달할 때에 말이라는 매체 속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아닐까요? 표정도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말로도 속이기 때문입니다. 말에서 진정성과 진실이 묻어나지 않는데, 믿음이 싹틀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 일컬어진 이래로 끊임없이 특정한 정치가(a politician)에 대한 신뢰를 가져왔습니다. 애걸복걸이라는 말이 더 어울 것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림살이가 나아질까, 먹을거리, 입을 것, 몸 누일 곳에 대한 평등성(균등성)을 자본가나 정치가가 보장해 줄까 하는 그런 기대를 하지만 실상 그러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민주주의, 민주주의하는데 그 주체(subject,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대문자 Subject와 소문자 subject를 구분하는 듯합니다)는 정치가가 아니라 민중, 곧 씨ᄋᆞᆯ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민주주의 실현 주체, 운동 주체, 행동 주체, 힘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말입니다. 신문을 비롯하여 언론 매체는 어떤가요? 그들 역시 현 정치체나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민중의 감성이 아니요 지배자나 통치자의 권력을 대변, 옹호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에 함석헌은 믿을 거라고는 오직 ‘우리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프랑스 현상학자 레비나스(E. Levinas)는 “타자의 근접성은 얼굴의 의미화이다.”(E. Levinas, 김도형·문성원 옮김, 타자성과 초월, 그린비, 2020, 47)라고 말하면서 “‘너’라고 말함, 그것이 말함의 최초의 사태이다. (…) 대면의 올곧음, ‘우리-사이’, 이미 대-담이고, 이미 대-화(dia-logue)이며, 그래서 거리이고, 합치와 동일화가 생산되는 접촉의 대립물인 것,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근접성의 거리, 사회적 관계의 경이로움이다.”(E. Levinas, 김도형·문성원 옮김, 타자성과 초월, 그린비, 2020, 114)라고 말합니다.

1인칭으로서의 나, 원자적 자아로서의 나, 바로 이 나의 특수성이 서로 만나서 격려하고 위로하는 상호주관적 관계입니다. 나와 또 다른 나로서의 너(너로서의 나)는 거리 있음의 주체적 나를 상정합니다. 믿음으로서의 나와 너. 함석헌이 말하듯이, 우리는 “‘나’ ‘너’ 때문에 나눠지고 한 나를 잃어버리는데, 나와 너란 사실 점[點, 저임(자기임)]을 하나 잘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등 뒤에 지면 나인데 가슴에 품으면 너다.”(함석헌, 인간혁명, 제일출판사, 1979, 307)는 생각을 잘 못합니다.

민중은 주체이지만 정치(가), 자본(가), 매체는 객체(대상)입니다. 나 주체-그것 객체(대상)를 믿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나 주체가 너 주체로 혹은 객체가 나 주체에게 동등하게 말을 걸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객체가 나/너 주체를 대상화할 경우 믿음은 사라집니다. 대상이 주체에게 영향을 주고, 주체를 변화시킬 거라는 믿음은 맹신/광신입니다. 믿음은 내게 말하고 말을 걸음으로써 객체와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변화, 상호호혜가 일어나야 참 믿음입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설정되는 믿음은 강제일 뿐입니다. 오히려 민중-주체의 말 걸음이 정치·경제·매체-대상의 이해나 수평적 이행이어야 하고, 민중-주체 자신의 믿음이 정치-객체에게 믿음으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나아가 민중의 위로, 격려, 상호호혜, 상호부조는 민중-주체와 주체의 마주-대함, 맞-대면, 대-화에서 이루어집니다. 연대와 연대는 주체를 서로 대상으로 인식하면 불가능합니다. 믿음은 주체와 주체의 만납니다. 정치, 자본(경제), 매체는 신뢰의 대상이지 신뢰의 주체가 아닙니다. 믿음의 주체적 근원지는 민중과 민중의 열린 연대, 도움, 상호 위로, 상호 격려에 있습니다. 정치도 자본도 매체도 아닙니다. 그것이 함석헌이 말한 ‘우리 자신’의 의미입니다.

믿음은 민중 주체로서의 씨ᄋᆞᆯ 자신에게서 흘러나와 그 믿음의 확산으로 정치, 자본(경제), 매체를 개혁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지금 씨ᄋᆞᆯ 자신이 가지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씨ᄋᆞᆯ과 씨ᄋᆞᆯ이 나누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정치나 자본이나 매체는 씨ᄋᆞᆯ이 씨ᄋᆞᆯ을 믿지 못하는 그 모래알 같은 근성 사이로 파고 들어 불신을 더 조장합니다. 따라서 정치(가)나 자본가/이나 매체에 기댈 것이 아니라 씨ᄋᆞᆯ의 바탈이 지닌 순수한 믿음에 기초한 자생적, 자치적, 자존적, 자립적인 자유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鹿山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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