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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어록 365일

개인이냐 진화냐, 진화냐 퇴화냐

by anarchopists 2020. 1.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6/26 11:39]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 다시 읽기-2]


개인이냐 전체냐, 진화냐 퇴화냐

“-개인이냐 전체냐- 역사상에 요단강은 한 번만 아닙니다. 몇 번이고 있었고, 이 앞으로도 또 몇 번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건너고 있는 요단강은 개인에서 전체로 건너가는 경계선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건너감 중에서도 아주 큰 건너감입니다. 그만큼 더 어렵습니다.... 6,7천년 전 이 역사시대라 불리는 시기에 들어오게 될 때에 또 한번 큰 건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원시공동체의 살림에서 개인의 발견에 들어가는 시기입니다. 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는, 자세하게 볼 때는 부족시대니, 봉건시대니, 민족주의 시대니, 제국주의 시대니 여러가지 변천이 있었지만 크게 보면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이 중심이 되어서 전개되어온 역사라는 데서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전쟁 영웅으로부터 현대의 이상주의 철학, 개인적인 영혼 구원의 종교에 이르러서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큰 변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직 옛날의 개인 중심의 그 역사의 계속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조금 먼저 느끼는 사람의 눈으로서 한다면 이것은 이날껏 개인이 생각하는 주체로 있던 데서 전체가 주체가 되어 생각하려면 변동의 시작입니다. 옛 사람은 완전히 자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 와서 보면 개인 뒤에는, 굉장한 천재의 경우까지도, 언제나 전체가 서 있어서 그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은 전체의 구체적 나타냄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술의 고등 발달로 인해 사회구조가 유기적인 것으로 변함으로 인하여 일어난 현상입니다.

생명은 예로 돌아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인을 무시한 원시공동체에 되돌아감이 아닙니다. 개인의 가치를 완전히 인정하면서 전보다도 보다 높은 전체의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이 요단강은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만 무사히 건너갈 수 있고 따라서 새 약속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옛날의 예언자, 선견자, 성인, 선인하는 이들이 환상 속에 어리둥절 느꼈던 것이 이제 우리게 구체적인 의무로 당면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전체의 구원 없이 개인의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의 나라란 개체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개체인 지경입니다. 거기 너 나도 없고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이제 역사는 거기를 지향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전집8:383-85)

“민족은 개인보다는 한층 더 높은 생명이다.... 개인의 참 사는 것도 민족 전체가 철저한 보다 높은 자아의식에 이르러서만 될 수 있다.... 보다 높은 전체의식이 나와야 한다.... 민족이 전체라 했지만 민족도 궁극의 전체는 아니다.... 민족이 개인의 복수만은 아니듯이 인류도 민족의 복수만은 아니다. 보다 큰 전체이다.... 그러나 인류도 마지막 전체가 될 수는 없다. 그 밑에는 또 우주라는 또 하나의 더 크고 더 알 수 없는 테두리가 놓여 있다.... 그(우주) 밖을 나가면 정신계라는 더 알 수 없는 지대한 둘레가 있다. 그것은 믿음으로서만 들어갈 수 있는 정말 살아있는 전체이다.... 그 전체는 늘 고정된 전체가 아니라 자꾸 자라가는 전체였다... 또 보다 더 큰 하나님을 체험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자라게 된다.”(9:298-99)

함석헌은 개인주의를 넘어선 ‘전체주의’를 강조한다. 전체론(holism)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러나 히틀러식 전체주의(totalitarianism)와는 다르다고 경고한다. 그는 성스러움(holy)을 전체(whole)와 같이 본다. 어원적으로 맞다. 그래서 전체는 성스러운 ‘하나-님’이 된다. “나는 아버지 전체(全體)와 같이 있는 나지, 개인이 아니다.”(2:159)

그는 그러한 사유의 움틈이 1960년대초 샤르뎅의 사유에서 자극을 받은 것도 없지 않지만, 아직 ‘전체론’(holism) 개념에는 접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 나름의 사색 속에서 충분히 그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 창조적 사고가 서양사상과의 접촉점을 내장하고 있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 맥락에서 19세기에 서양에서 발전한 사회학적 접근법과의 유사성이 나타나고 ‘사회진화론’과도 맞닿는다.

함석헌은 개인/개체와 별개로 ‘전체’의 존재를 가정한다. 전체는 개체들의 총합만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이다. “전체는 부분의 모아놓은 것보다도 크다.” “부분이 있어야 전체가 있지만 전체는 부분의 총합만은 아니다.” 이것은 콩트(Compte)와 더불어 사회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두르켐(Emile Durkheim 1858-1917)이 정의한 ‘사회’와 그대로 일치한다. 소위 사회진화론의 걸개를 처음 정립한 학자는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2-1903)였는데 그도 사회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함석헌이 이들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는 증좌는 없다
‘사회’는 또한 '공동체'(community)로 표현되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철학사상에 있어서나 대부분의 종교에 있어서는 개인이라고 하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고 그 개인으로서의 나와 하나님이 대화하는 것같이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때 나라는 것은 나는 나지만 그 뒤에는 전체가 있는 것이고 전체에서 떨어진 내가 아니다. 이것이에요. 단순한 소위 ‘인디비듀얼’(individual 개인/개체)은 아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은 커뮤니티의 일부분이라기보다 아까 말한 대로 커뮤니티가 독특하게 나타나 있는 하나지요.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과 대화한다 할 때 그 나라라는 것은 커뮤니티로서의 나이지 인디비듀얼로서의 나는 아니다, 이것입니다. 과거의 어떤 역사와 단계에 있어서는 인디비듀얼이 되는 것이 오히려 참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제는 우리 인류가 그런 단계를 벗어났다고 보아요. 어린애가 점점 자라듯이 인류의 마음 살림도 점점 자라났고 개인도 새로이 스스로를 깨닫게 된 지금 2천 년 전의 그 종교관념 그대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지금까지의 생각하는 주체는 개인이었지만, 앞으로 인류 살림의 생각하는 주체는 커뮤니티이다, 그런 역사의 진화단계가 지금이다, 그 말이에요.”(9:389-90)

서양사상과 아무런 관련 없이도 ‘사회’와 ‘진화’를 함석헌에 적용하여 두 낱말의 조합인 ‘사회진화’를 엮어낼 수 있다. 지금 함석헌이 ‘사회진화론자’냐 아니냐, 사소한 문제를 두고 기념사업회 내부에서 소모전이 한창이다. 학문의 사대주의를 언제까지 계속해 갈 것인가. 함석헌이 성장환경 속에서 불가피하게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동서를 넘나들거나 초월하면서 정신성장에 필요한 요소들을 흡수하고 융섭하는 한 편으로 역사와 사회의 통찰과 내면 탐구를 통해서 삶의 원리를 길어 올린 전형적인 토착 사상가가 아니던가. 그가 심어놓은 ‘씨’ 속에는 동서의 모든 사상이 융화되어 있다.(“우리가 내세우는 것”을 보라.) 원효처럼 함석헌도 한국인이 아니고는 이를 수 없는 사유방식을 들어내고 있다. 왜 구태여 서양과 연결하려 하는가.

인류의 진화단계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있는가. 겨우 민족공동체 단계에 머물러 있다. 아니 그 이전이다. 민족분단의 현실에서 지역주의 정치가 판치는 지역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보다도 개념(‘사회’)하나로 물고 뜯는 사색당쟁 식 분파주의적 집단행태를 보면 아직도 사실상 개인주의시대에 정체되어있는 꼴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국인에게 ‘사회진화론’은 이상이고 현실은 ‘개체퇴화론’이 맞지 않을까.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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