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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민중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by anarchopists 2020. 1. 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0/21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민중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이 나라가 뉘 나라냐. 삼천만(지금은 오천 만임) 민중의 나라다.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다. 만주벌판 거친 풀 우거진 버들 숲을 후려내고, 백두산 천지 가에 내리는 하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세운 것도 이 민중이요. 한반도 얼크러진 골짜기의 가시덤불 자갈밭을 고이 고르고, 오대강 언덕 위에 흐르는 물소리 속에 영원한 이상의 부름을 들어, 금수강산의 글월을 짜낸 것도 이 민중이요. 동해ㆍ서해의 쉴 날 없이 들이치는 맑고 흐린 물결과 싸우며, 하늬바람ㆍ마파람의 끊임없이 오고가는 부드럽고 사나운 날씨에 시달려, 오천년 파란곡절의 역사를 지켜온 것도 이 민중이다
.(함석헌, 〈매국외교를 반대한다!〉, 《함석헌저작집》, 한길사, 2009 45쪽)

위 글은 함석헌선생님이 1964년에 쓰신 글입니다. 함 선생님은 박정희 쿠데타 권력이 일본과 매국적인 외교(한일회담)를 시도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주인인 민중들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일본과 매국적인 외교를 맺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위 글에서 핵심은 민중(民衆)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민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민중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자어입니다. 민중이라는 용어를 한영사전에서 찾아보면, “the people; the mass of people; the masses; the public; the populace; people in general; the multitude” 등으로 적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민중에 대하여 단순한 개념으로 적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민중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 배경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먼저 민중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보기로 합시다.

한반도에서 일제시대가 끝난 뒤(1945)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지식인들과 민족통일세력들은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1863.11.19)의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by the people”(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에서 ‘the people’(자유와 권리의 주체)을 인민(人民)으로 번역하여 썼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民主主義)의 민(民)을 자유와 권리의 주체인 인민(the people)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반도 남부에서 자유주의세력들은 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The Republic of Korea)을 건국합니다.(1948.8.15) 그러자  한반도 북부에서도 사회주의세력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korea)을 수립합니다.(1948.9.9.) 그리고 북은 군대도 인민군으로 명칭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지역의 국호에서 볼 때, 대한민국의 민民과 北의 인민은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영문표기에서 북은 people's(인민의)가 들어가지만 대한민국은 people's가 빠집니다.


한편 북한의 국호에 인민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고, 점차 인민의 의미가 역사 속에서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혁명성을 띠게 됩니다(박헌영,《조선인민에게 드림》,1946) 그러자, 남한에서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기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될 때 의도적으로 인민이라는 용어를 기피하고 국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제헌의원이면서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兪鎭午, 1906 ~ 1987)은 “헌법 제정과정에서 자유와 권리의 주체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인민’이라는 용어가 사라진 점을 못내 아쉬워하였습니다”(김성보, <남북국가수립기 인민과 국민 개념의 분화> ≪韓國史硏究≫144, 韓國史硏究會, 2009) 이로써 대한민국은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 민(民)에 대한 인식이 약화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인민이 “국가의 한 구성원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강요받는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이 결과, 이승만 반공독재와 박정희 군부독재를 출현시켰습니다. 그리고 국민은 이들 독재권력에 복종ㆍ희생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에 1960년대, 남한의 진보적 지식인과 사회운동가들은 북의 계급투쟁의 성격도 아니고 남의 독재권력에 희생되는 국민도 아닌 새로운 개념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해방 이후 사용되던 ‘인민대중人民大衆’(인민+대중)이라는 용어에서 한 글자씩 따서 民衆(민중)이라는 조어를 만들어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한의 민중은 국민이라는 단어와 달리 북한의 인민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즉, 영어표기인 ‘the people’의 개념을 그대로 반영한 용어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민중이라는 단어는, 1970년대  박현채(1934~1995)가 《민족경제론》(1978)에서 민중의 개념을 사회과학 용어로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됩니다. 이때부터 민중은 '역사의 주체'를 말하게 됩니다. 이후 민중은, 정치적으로 불의(不義)의 권력에 의해 인권을 침해당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며, 사회적으로는 교육과 의료와 직업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말하게 됩니다. 이들 민중들이 결국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던 민주화운동세력의 대명사가 됩니다. 그러나 민중은 사회구성원의 성별ㆍ인종에 관계없이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에 놓인 계층을 모두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1970년대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을 “소외받고 탄압받는 사람들”(서남동)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즉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며 군부독재정권으로부터 억압 받는 세력”을 민중으로 보았습니다.(박재순, <씨알사상과 민중신학>, 《씨알의소리》 1988년 12월호) 1980년대에들어오면, 한국 학생사회에서는 민중의 개념을 놓고 민족해방을 주장하는 세력과 민중민주를 주장하는 세력이 분열하여 대립하게 됩니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돌베개, 2009) 그러면 함석헌은 민중을 어떤 개념으로 보았을까요. " 자주자치의 주체, 나라의 주인"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곧 민중이 나라의 주체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주인인 민중을 제쳐놓고 한미FTA를 밀실에서 재협상하고 타결을 보았다면, 이는 1963년의 박정희의 매국적인 한일회담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2010.10.18. 저녁,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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