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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농촌에 농부는 없고 사장님만 있다.

by anarchopists 2020. 1. 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0/22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농촌에 농부는 없고 사장님만 있다.

1. “농부의 일은 곡식을 짓는 것이지만 그 잘하고 잘못함은 한 해에 거둔 곡식의 많고 적음에 있기보다는 그것을 놓고 어떻게 결산을 하느냐 하는 데 있다. 농사는 한 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농사꾼은 “굶어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것이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민도 한 시대만 사는 것 아니라 영원히 발전할 것이기 때문에 그 국민의 어질고 어리석음도 그 치른 사건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을 치르고 나서 어떻게 역사적 결산을 하는가 하는데, 즉 시대의 매듭을 지음에 있다. 농부에게 중요한 것은 한 해만 아니라 일생을, 자기만 아니라 자자손손이 한다는 그 인생관이요, 국민에게 중요한 것도 마찬가지로, 한 대만 아니라 영원히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역사적 주체의식이다.” (함석헌, 〈싸움은 이제부터다〉, 《함석헌저작집》4, 한길사, 2009, 63~66쪽)

위 글은 1965년 사상계 10월호에 쓰신 글입니다. 당시는 매국적 한일외교 반대 데모가 한창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박정희 권력이 계엄령(1964), 위수령(1965) 등을 발동하면서 민중을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총칼과 탱크의 힘 앞에 민중들은 잠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함석헌 선생님은 민중들에게 군인독재 권력과 싸움은 일단 매듭을 짓고 새로운 싸움준비를 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위 글은 그러한 메시지 중 농민을 비유한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가지고 오늘은 농민과 농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글쓴이가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산속에 들어와 과수농사(사실 농사는 곡식농사가 참농사이지, 과수농사는 참농사가 아니다)를 짓고 있는 탓에, 가끔 도시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질문을 받는 말이 있습니다. “올 농사 잘 되었나”, “올 수확량이 많아”, “올 풍년인가” 이러한 질문은 사실 달갑지가 않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하고는 합니다. “하늘이 주는 대로 농사를 짓습니다.” “하늘이 적게 주면 적게 먹고, 많이 주면 그만큼 나누어 먹습니다.” 이러한 나의 대답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기대하는 대답(고맙다)을 해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요즈음, 농촌에 이상한 바람이 붑니다. 논과 밭을 가지고 있는 농부들에게 사람들이 모두 “000사장님”이라고 호칭합니다. 아니 땅이 없어도 모든 사람들에게 “사장”이라고 부릅니다. 농부들이 사장 아닌 자가 없습니다. 관(농업기술쎈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농민들보고 죄다 “사장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농민은 어디까지나 ‘농부’가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요. 지금 이러한 농민=사장의 호칭은 농촌에 부패한 자본주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인간의 영혼을 썩게 만드는 독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정신을 썩게 만드는 자본주의 바람이 농촌에까지 불어왔으니 농민들의 정신이 안 썩고 배겨 나겠습니까. 농민들도 자본주의식 사장(부자)이 되고 싶은 겝니다. 그래서 서로 “사장님” 하고 부릅니다. 오늘도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이 김사장, 잘 지냈나” 참으로 딱한 광경입니다. 어쩌다 우리 농촌이 이 자경까지 왔는지. 최근에 들어와서 특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함 선생님 말대로 부자가 중요한 게 아닌 데 말입니다.

농사가 “잘되고 안 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농부로서 이 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올바른 먹거리를 제공했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농사를 내 후대, 또 이 나라 미래에 좋은 농사환경을 물려줄 수 있도록 농사를 짓고 있는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요즈음 농민들은 후대에 자기 자식에게 농업을 가업으로 물려주고 싶은 농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 농민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는 농민은 하나도 없습니다. 더더구나 미래를 내다보며 농사를 짓는 이도 없습니다. 당장 소출이 많으면 됩니다. 도시 소비자의 건강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장 내가 돈만 벌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으니 ‘사장님’(부자님) 소리를 듣고 싶음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사장으로 둔갑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한심스런 풍경입니다. 농부는 돈을 베고 죽을 정신을 가진 자가 아니라 “씨앗을 베고 죽을” 정신을 가진 자야 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 농촌이 이 지경까지 왔는지, 이 나라 농촌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2010. 10. 22 아침, 취래원 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 본문 내용에서 사진은 네이버 이미지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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