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6/1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험은 경험된 세계에 대한 지평 해석 및 의미의 한계와 관련된 것이지, 타자와 공유된 절대적 지평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것이 경험을 절대화할 수 없고 경험에 대한 인식을 도그마화할 수 없는 까닭이다. 나아가 사건들의 지평에 따라서, 그리고 사건 속에서 의식은 발견된다. 사건과 더불어 의식이 발생하면서 의식이 사건 속에서 현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건에 대해서 감각하고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사건은 일어난다기보다 다가오는 것이다. 개별적 인간에게 사건은 다가오고 그 사건을 해명하기를 기다린다. 그때 사건 해명을 위한 1차적 조건은 감각적 경험이란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감각적 경험은 모든 타자와 공통될 수 없지만 적어도 경험하고 있다는 존재 인식은 가능하다. 그러나 감각 경험을 의식하고 해명하는 것은 그것을 일반화하는 작업, 즉 이성을 통해 ‘개념화’ 해야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보편화하는 존재는 그 사건을 경험한 것을 해명하기 위한 이성적 행위의 2차적 조건이다. 여기에서 개입되는 것이 인간의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 등의 어느 일정한 ‘관점’이다. “시간의 연쇄 속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우리의 영혼 혹은 마음이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묻자마자 바로 미지의 것이 되어 버린다...”(J. Bousquet, 김관오 옮김, 달몰이, 아르테, 2007, 78쪽) 그러나 관점이란 사건을 만나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 없는 몰주체성으로 변한다. 사건 혹은 사건의 경험이 생(生)의 근저를 맴돌면서 주체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이념 논쟁, 색깔 논쟁으로 정국(政局)이 소모전을 벌이고 있다. 민초들의 삶이 이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되는 생 그 자체의 존재론적 지위(위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념은 선도 악도 아니다. 이념이 맡아가진 그 형식 때문에 다만 그렇게 될 뿐이다. 이념(의 논쟁)은 시대적 산물이다. 또한 존재의 부산물, 삶의 소산물이기도 하다. 아니 조에 부스케(J. Bousquet)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보조물’에 불과하다. 그것을 마치 주산물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인간이 생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일이 아닌가.
삶의 감각적 경험, 그리고 사건으로서의 경험에 의해서 이념이 육화된 것이라면 어떤 이념도 절대화될 수 없다. 하나의 이념은 또 다른 이념과 대립하면서 한쪽을 유배시킨다. 그러나 이념으로 인해서 오히려 생 그 자체가 유배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념이 전체의 한 점이라면 생은 한 점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념이 생을 도래하게 할 수 없다면 이념은 청산해야 한다. ‘종북’이라는 말도 언어도단이요, 생을 강제하는 거짓된 상상력일 뿐이다.
언어가 생을 바라보게 하고 생의 사건에 대한 의미를 육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생을 밀착시키고 사건으로서의 경험 세계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사고․사유․의식이어야 생이 조각나지 않을 것이다. 생에서 이탈하는 사건, 생을 기만하는 의식 속에 있는 나는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에 부스케의 말을 거듭 인용하면, “인식의 의식은 그의 감정이 향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도덕적 균형을 만들어야 한다.”(J. Bousquet, 김관오 옮김, 달몰이, 아르테, 2007, 83쪽) 인간은 단지 끊임없는 의식의 고양을 위해 이성과 의식의 깊이로 상승해가야 한다. 그것만이 인간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의식의 진보[앞으로 나아가는]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마땅한 것이지만, 이념적 진보[보수]는 필연적이지 않다. 생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는 또 다른 이념의 논쟁 역시 자신의 역사적 감각 경험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념은 사건의 해명을 기만하고 생과 사건보다 우선하려는 욕망이 크기 때문에, 이념, 언어 혹은 개념의 '흠' 속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의 생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난만(爛漫)한 이념의 궁핍이야말로 우리가 소유해야 할 권리일지 모른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시사코리아저널).
이념(논쟁)보다 생을 앞세우라!
인간은 자신의 경험 세계의 지평을 벗어날 수가 없다. 또한 인간의 경험은 경험 가능한 세계에 대한 경험일 수 없다. 경험은 경험된 것으로서의 그것, 혹은 그것에 대한 진술이다. 따라서 경험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확정짓지도 단정 짓지도 못한다. 오직 과거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감각에 대해서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경험은 사건들의 지평이다. 사건이란 일어나고 다가오는 지평이 모두에게 동일하지 않다. 동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사건에 대한 감각적 경험의 절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험은 경험된 세계에 대한 지평 해석 및 의미의 한계와 관련된 것이지, 타자와 공유된 절대적 지평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것이 경험을 절대화할 수 없고 경험에 대한 인식을 도그마화할 수 없는 까닭이다. 나아가 사건들의 지평에 따라서, 그리고 사건 속에서 의식은 발견된다. 사건과 더불어 의식이 발생하면서 의식이 사건 속에서 현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건에 대해서 감각하고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사건은 일어난다기보다 다가오는 것이다. 개별적 인간에게 사건은 다가오고 그 사건을 해명하기를 기다린다. 그때 사건 해명을 위한 1차적 조건은 감각적 경험이란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감각적 경험은 모든 타자와 공통될 수 없지만 적어도 경험하고 있다는 존재 인식은 가능하다. 그러나 감각 경험을 의식하고 해명하는 것은 그것을 일반화하는 작업, 즉 이성을 통해 ‘개념화’ 해야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보편화하는 존재는 그 사건을 경험한 것을 해명하기 위한 이성적 행위의 2차적 조건이다. 여기에서 개입되는 것이 인간의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 등의 어느 일정한 ‘관점’이다. “시간의 연쇄 속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우리의 영혼 혹은 마음이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묻자마자 바로 미지의 것이 되어 버린다...”(J. Bousquet, 김관오 옮김, 달몰이, 아르테, 2007, 78쪽) 그러나 관점이란 사건을 만나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 없는 몰주체성으로 변한다. 사건 혹은 사건의 경험이 생(生)의 근저를 맴돌면서 주체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이념 논쟁, 색깔 논쟁으로 정국(政局)이 소모전을 벌이고 있다. 민초들의 삶이 이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되는 생 그 자체의 존재론적 지위(위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념은 선도 악도 아니다. 이념이 맡아가진 그 형식 때문에 다만 그렇게 될 뿐이다. 이념(의 논쟁)은 시대적 산물이다. 또한 존재의 부산물, 삶의 소산물이기도 하다. 아니 조에 부스케(J. Bousquet)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보조물’에 불과하다. 그것을 마치 주산물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인간이 생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일이 아닌가.
삶의 감각적 경험, 그리고 사건으로서의 경험에 의해서 이념이 육화된 것이라면 어떤 이념도 절대화될 수 없다. 하나의 이념은 또 다른 이념과 대립하면서 한쪽을 유배시킨다. 그러나 이념으로 인해서 오히려 생 그 자체가 유배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념이 전체의 한 점이라면 생은 한 점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념이 생을 도래하게 할 수 없다면 이념은 청산해야 한다. ‘종북’이라는 말도 언어도단이요, 생을 강제하는 거짓된 상상력일 뿐이다.
언어가 생을 바라보게 하고 생의 사건에 대한 의미를 육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생을 밀착시키고 사건으로서의 경험 세계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사고․사유․의식이어야 생이 조각나지 않을 것이다. 생에서 이탈하는 사건, 생을 기만하는 의식 속에 있는 나는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에 부스케의 말을 거듭 인용하면, “인식의 의식은 그의 감정이 향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도덕적 균형을 만들어야 한다.”(J. Bousquet, 김관오 옮김, 달몰이, 아르테, 2007, 83쪽) 인간은 단지 끊임없는 의식의 고양을 위해 이성과 의식의 깊이로 상승해가야 한다. 그것만이 인간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의식의 진보[앞으로 나아가는]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마땅한 것이지만, 이념적 진보[보수]는 필연적이지 않다. 생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는 또 다른 이념의 논쟁 역시 자신의 역사적 감각 경험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념은 사건의 해명을 기만하고 생과 사건보다 우선하려는 욕망이 크기 때문에, 이념, 언어 혹은 개념의 '흠' 속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의 생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난만(爛漫)한 이념의 궁핍이야말로 우리가 소유해야 할 권리일지 모른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시사코리아저널).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 > 김대식 박사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픈 역사, 그리고 잊히지 않는 사람들 (0) | 2019.11.15 |
---|---|
자기 자신이 된 적이 없는 사람들 (0) | 2019.11.15 |
고통당할 권리? 착취당할 의무? (0) | 2019.11.14 |
대립이 아니라 평화, 상호부조여야 한다! (0) | 2019.11.14 |
마키아벨리, 인간을 불신하다! (0) | 2019.11.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