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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모든 종교여,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거부하라.

by anarchopists 2019. 12.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2/16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종교비판3]


_“종교는 시대를 감시하고 가르치고 심판할 것이지
시대가 청하는 잔치에 가서 먹고 앉았을 것이 아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종교는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드높였던 역사의 종교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정치적 비판가의 몫을 담당하던 힘들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종교는 자본에 편승해서 안착하고, 자본에 물든 대중들을 위한 편안한 안전장치 역할을 하더니, 결국 진리의 기치 아래 정언(正言)을 해야 하고 행동을 취해야 하는 자신의 역할을 직무유기하고 있다. 특히 현정부가 들어서면서 종교간의 갈등은 더 심화되고 특정종교 스스로가 기득권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맘몬의 선봉이 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함석헌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현대교회 중에 자본주의적인 생활 속에 있지 않는 교회는 없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 살면서 덮어놓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으로 믿는다. 자기네 손에 들어오는 수입이 과연 사회정의에 합한 과정을 밟아오는 것인가 아닌가는 생각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은혜라고만 한다. 그러나 성단(聖壇) 위에 놓이는 돈은 피가 묻은 돈들이다. 굉장한 교회당은 사실 엄정하게 볼 때 맘몬이 세운 것이요, 맘몬의 힘으로 유지되어 가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만일 자본주의에 젖어 피 묻은 옷, 음행으로 더러워진 옷을 정말 십자가에 죽은 어린 양의 피에 깨끗이 씻는다면 당장에 모든 정치적, 경제적인 세력과, 전투 관계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함석헌저작집, 새 시대의 종교, 한길사, 2009, 48-49쪽).

화폐권력에 맛을 들인 교회는 대형 주차장을 갖춘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속도전의 자본의 목회는 그 형식은 이미 자본을 닮아 있다고 해서 과언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 불교의 사찰에서 시행하는 템플 스테이도, 그리고 이제 곧 처치 스테이를 기획하고 있는 교회도 자본의 결과요 자본 창출의 도구화가 돼버린 웰빙적 만족의 수단에 지나지 않고 있다면 지나친 비판일까.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정신을 가르치고 교육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 수단과 방법 그리고 대상을 결정하는 것 또한 철저하게 종교적 정신에 위배된다면 종교 스스로 모순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수단화해서 또 다른 측면에서 종교를 홍보하고 선전, 광고하며 더 나아가서 포교나 선교 혹은 개종을 위한 목적이라면 전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종교의 이상(理想)을 빙자하여 종교를 팔아먹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아니 신을 매매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함석헌의 비판을 새겨보자. “새 종교를 내놓은 것은 인간이 아니요, 절대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것이지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이 의미에서 모든 종교제조자는 협잡꾼이다. 종교는 받아들일 것이지 만들 것이 아니다. 종교는 의식적으로 되는 인위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기성교회에서 내쫓김을 당하는 태아적인 정신이 현 문화사회에 도전을 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함석헌의 논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종교란 모름지기 현재의 자본화된 문화를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며, 그에 대한 대항담론과 대안담론을 말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대항적, 대안적 공동체의 삶을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훌륭한 교회의 영성가나 불교의 고승들은 물질을 멀리하고 내면의 깊은 정신세계를 맑고 순수하게 닦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성인들이야말로 종교제조기가 아니라 신의 것을 받아들이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을 살아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야말로 ‘겉’이 아니라 ‘속’, ‘돈’이 아니라 ‘마음’에 무게를 두었던 것이다.

함석헌이 “종교야 원래 속을 문제삼으라는 것, 속만이 문제라는 것이다”(56)라고 말했듯이 껍데기 종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속은 정신이요, 영혼이고 초월과 영원이라면, 겉은 물질이요, 현세요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나치게 현세의 물질이라는 인위에 경도되어 있다. 종교는 그것을 비판하고 다시 순수한 정신으로 가자고 말해야 한다.

칼 마르크스는 일부 대중들의 소박한 상식으로 유물론자로 낙인이 찍혀 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비판했던 것은 인간에게 신이 되어 버린 자본주의의 물질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 에리히 프롬의 긴 변론을 붙여보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소유하고 사용하고 싶다는 욕구에 지배되는 불구화(不具化)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지향하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이며, 거기에서는 이윤이나 사유 재산이 아니라 인간의 힘의 자유로운 개화(開花)가 인간의 주요 목적이 된다. ‘풍부하게 갖는’ 인간이 아니라 ‘풍부한’ 인간이야말로 완전히 성숙한, 진정으로 인간적인 인간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변가들은 마르크스를 이른바 ‘유물주의적’인 의도를 가졌다 하여 비난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어떤 사실을 왜곡시키고, 그 왜곡을 합리화시키는 재능을 지녔다는 가장 악질적인 실례의 하나이다”
(Erich Fromm, 현재라는 이름의 환상, 김진욱 옮김, 오른사, 1980, 58-59).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종교는 윤리적인 한에서 긍정된다”는 말을 하면서 “‘절대’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오십 보 백보)이다. [...] 오십 보와 백 보 사이에는 적어도 오십 보의 차이가 있고, 그것이야말로 ‘절대’다”(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송태욱 옮김, 사회평론, 2001, 109쪽)라고 말했다. 참 종교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이 절대라는 것을 추구하고 그 절대에 입각한 공동체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타자가 용인할 수 있는 윤리적 가치를 구현하는 종교가 좀 더 참 종교의 근사치에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일 게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임금을 갈취하며 숱한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자본가들을 편드는 종교를 우리는 윤리적이라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그러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이웃 종교의 신자 뺏기를 하다못해 거의 인수합병식의 점령을 해버리고, 땅밟기와 타종교를 폄훼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종교상품이 가장 우월하다고 광고하는 독점자본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마켓팅 전략을 모방하려 든다면, 종교는 윤리적으로 부정(不正), 부정(不貞), 부정(不淨), 부정(否定)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건목생수(乾木生水)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 마른 나무에서 물을 낼 수가 있겠는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자본에 물들어 버려서 이미 정신은 바싹 메마르고 영성적으로는 더 이상 흘러나올 수 없는 종교를 종교라 말할 수 없으며, 그곳에서 생수를 기대하는 것조차도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목우인의(木偶人衣) 즉 인형에 사람의 옷을 입혀 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종교는 자신을 정화해야 하고, 마른 나무처럼 생기가 없는 종교에 순수하고 깨끗한 물을 신으로부터 공급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결국 종교가 자본과 멀면 멀수록 매우 정제된 영성과 정신의 가치를 머금을 수 있으리라(2011/02/16,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내용 중 사진은 인터넷 네이버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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