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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말씀

[말씀과 명상] 함석헌의 "말씀과 명상"

by anarchopists 2020. 1. 1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5/24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오늘부터
함석헌의 《말씀과 명상》으로 새 장을 엽니다

이제부터 여기 올리는 글은 포맷을 조금 달리하려고 합니다.

여태까지는 일정한 정형이 없이 그때그때 이런저런 글들을 실어왔습니다. 학자들의 글과 시사논평 등이 주류였습니다.  학자들의 글은 아무래도 전달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만의 용어사용과 표현방식이 있기 때문에 일반대중이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학자들 간에도 상호이해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대개 몸으로 하는 살아있는 말(활구)이 아니고 머리를 굴려서 나온 죽은 말(사구)입니다.
함석헌은 다릅니다.
그의 말은 펄펄 살아서 우리 가슴에 꽂힙니다. 학문과 이론을 논하자고 우리가 이 평화포럼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씨알의 소리’를 듣고 내자고 한 것입니다. 함석헌처럼 자아의 깊은 연못에서 길어 올리는 소리여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씨알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평생 함석헌을 따르며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전혀 달라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학자고 아니고 간에, 자기 명리를 위하여 함석헌을 도구로 이용하고들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조직종교가 보이는 행태와 비슷합니다. 목표를 잃고 그 도구인 종교의 허울 속에 함몰되어 있는 꼴입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일찍이 종교혁명, 새 종교를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을까요. 오늘의 종교의 꼬라지를 보면 회의(懷疑)가 듭니다. 그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이단적이라고 외면했습니다. 기득권을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든 뭐든 다 이권 싸움입니다. 교회를 팔거나 세습시키고 박 터지게 주지 싸움을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종교가 정치나 경제와 다른 게 무엇입니까. 교육은 또 어떻고요. (상지대학, 세종대학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온통 시장판입니다.) 이것이 부끄러운 한국사회의 단면입니다.

그래서 먼저 함석헌의 말씀을 직접 읽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놓고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풀어보자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그 이상 더 나은 우리가 기댈만한 준거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읽다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이라면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그런 글을 뽑아서 올리겠습니다. 정치경제, 언론, 교육, 종교/철학, 역사, 생태환경, 문명비판, 세계관/인생관 등 몇 갈래로 분류하여 균형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 분야 전문가가 맡을 것입니다. 하지만 함석헌 선생의 말씀은 어느 한 분야로 분류하기 힘든 종합적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인용될 본문은 한 문단 정도로 반 쪽 정도 이내의 길이가 될 것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본문만으로도 좋겠지만, 선정자의 간단한 해설과 감상을 덧붙일 것입니다. 꼭 해석내용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참고가 되고 자기 생각을 유도할 생각꺼리가 될 것입니다. 본문이 너무 자명한 내용이라면 구태여 군말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것은 선정자에 맡깁니다. 이 장은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이 취지에 합당한 글이라면, 본문이 될지 댓글 형식으로 될지는 몰라도, 실을 가치가 있습니다.

이 형식은 잘 알려진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연상시킬지도 모릅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 편지는 200만명 이상이 접속하는 아주 유익한 정보입니다. 우리 사회의 희망입니다. 물론 그것과 우리가 하려는 것은 내용과 목표 면에서 다소 다릅니다. 앞 것은 개인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메시지들입니다. 우리 것은 함석헌의 메시지나 함석헌식 메시지가 주 내용입니다. 그것은 주로 사회의 개혁/혁명/진화와 개인의 의식전환과 탈바꿈을 초점으로 합니다. 물론 두 가지 다 필요하고도 상호보완적인 정보들입니다.

최근 교수신문사에서 각계 전문가에게 근현대 한국사에서 논쟁 대상이 될 인물 100명을 선정하게 했더니, 통틀어 함석헌이 가장 많이 득표했답니다. 그만큼 함석헌은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 험난한 시국을 해쳐나갈 지혜를 줄지도 모릅니다. 물론 함석헌의 말씀만이 씨알의 소리가 아닙니다. 모든 씨알이 양심의 밑바닥에서 나온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래서 점점 새로운 씨알의 소리의 비중이 늘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씨알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사회를 짊어질 우리 아이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씨알의 소리는 이제 새롭게 나와야 합니다. 19세기나 20세기의 소리와는 다른 21세기에 맞는 소리로 나와야 합니다. ‘씨알의 소리 21’이 되어야 합니다. 21세기는 진정한 씨알세 상(누리)이 되어야 합니다. ‘씨알누리21’이 되어야 합니다. 신은 시대에 맞게 그의 화신(avatar)을 세상에 내보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낡은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그 소리로 일깨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석가도, 예수도 (“예수는 인도식으로 표현하면 아바타르 곧 화신(化身)입니다”-전집8:283), 부처도, 공자도 세상에 나와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갔습니다. 엉뚱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영화 〈아바타〉가 새로운 형태의 화신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한 화신이 나오는 시대가 아닐지 모릅니다. 성인시대, (함석헌이 말하다시피) 영웅시대는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군주주의시대가 아니고 민주주의시대가 온 것처럼, 전체 씨알(民)이 화신입니다. 씨알은 여럿(多)이면서 하나(一)입니다. “씨알! 하늘의 별보다도, 바다의 모래보다도, 많으면서도 한 알인 씨알”입니다.(전집8:278) 하나-여럿의 유기적 관계를 말하는 (一卽多 多卽一) 불교 화엄철학과 상통합니다. ‘하나-님’은 그 하나 즉 전체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함석헌의 신관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우선 함석헌 정신을 밝히고 살려내는 일입니다. 그 일이 어느 정도 되고나서, 우리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를 디딤돌로 삼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언제까지고 그 이름에 매달려 팔아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를 밑천으로 더 큰 진리의 광맥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밑천은 곧 동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를 넘어서야 그가 바랐듯이 우리(인류)가 다음 단계로 탈바꿈, 진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 평화 포럼’은 언젠가는 더 이상 ‘함석헌’을 말하지 않아도 될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말보다 정신의 실천입니다. 그것은 머리 굴리지 않고 뜻을 깨달아 체득, 체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설치될〈말씀과 명상〉에는 함석헌만이 아니고 그의 정신과 부합하는 다른 어진 스승들의 말이 실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말씀(logos)은 한 가지입니다.

한국사회는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 둘로 편이 갈려 있습니다. 지켜갈 것은 지키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 쪽 편향보다는 진보적 보수, 수구적 진보가 마땅한 길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자유, 인권, 평등 같은 인간의 기본 가치는 지키려하지 않고 자기만의 이익과 권리를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보수가 아닙니다. 수구입니다. 합의되지 않은 자기만의 목표를 세우고 일로 매진하는 것도 참 진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혼자만 달려가면 무엇 합니까. 양 극단을 초월한 중도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제3의 길일 것입니다. 이 중도를 함석헌이 제시했습니다. (물론 석가, 공자 같은 성인들도 제시했습니다.)

자,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고 씨알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자기 속으로 비추어보면서 그날의 화두로 삼아 명상합시다. 씨은 하나요 여럿입니다. 여럿이지만 하나입니다. 여기는 씨알/씨알들의 소리 방송입니다. (함석헌평화포롬 공동대표 김영호)


(후기)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여
시대의 사명을 갖고
6.2지방선거에 꼭 참여합시다.
우리는 정의와 평화사회로 나가야 합니다.
전쟁에 광분해서는 안 됩니다.
민족의 평화를 깨는 그 어떤 획책도 반대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여, 그대들의
유연한 사고를 선거에 꼭 반영해 주시요

운영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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