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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전미혜작가 단상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누구인가

by anarchopists 2019. 10.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7/01 06:03]에 발행한 글입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누구일까-

며칠 전부터 초여름 이른 더위에 부대낄 화분들을 위하여 베란다 한쪽 창을 노상 열어두었지요. 밤늦도록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와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잡담들이 뒤섞인 세상 소음들에 뿌연 도심 하늘을 떠돌던 먼지들은 하루가 멀다 않은 걸레질에도 수북이 쌓여지고 어쩌다가 낮 시간에 소낙비라도 지나는 날이면 베란다 깊숙이 달려든 빗물로 젖은 베란다 대청소를 감수해야 했지만,

더불어, 조석으로 드나드는 시원한 산들바람과 이른 아침 기꺼이 모닝콜을 자처하는 막 잠에서 깬 맑은 새소리와 늦은 밤 제 집인 양 다녀가는 달빛까지 도시에서는 쉽지 않은 호사를 누린답니다.

오늘 아침 화분에 물을 주며 가까이서 살펴보니 늘 남의 옷을 입은 듯 멀뚱한 안색에 매양 엇비슷한 표정으로 뜨악하니 서 있던 화초들의 푸른 이파리들이 어느 결에 짙어졌는지 바람과 햇빛이 드나드는 창 쪽으로 빠끔 고개를 돌리려는 듯 녀석들의 잎사귀마다 화색이 돌고 때깔이 달리 보였답니다.

오래된 정물처럼 무한정 베란다 공간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녀석들에게서 처음 느껴지는 살아 숨 쉬는 생것들만이 풍기는 싱싱함은 여느 철의 꽃보다 아름다웠습니다. 좁은 화분에 담겨서 사람의 의도대로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향유하던 화초들은 큰 일교차와 따가운 햇살에 무차별 노출되면서 사나흘 동안은 낯선 바람을 견디느라 먼지를 뒤집어쓴 듯 추레하더니 불과 보름도 지나지 않았건만 녀석들은 한낮의 뜨거움과 건조한 바람을 거뜬히 견뎌 낸 씩씩한 모습이랍니다.

어제는 종일 무장탈영병의 소식에 마음 졸이면서 문득, 보호라는 명목으로 구석자리에 방기(放棄) 해버린 우리 아이들과 베란다의 화초 생각을 했지요. 어미 된 입장 탓인지 탈영한 병사도, 다치거나 죽은 병사들도 모두 내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종일 가슴이 두근거렸고 어쩌다가 우리는 아직도 국방의 의무라는 굴레를 우리 아이들에게 숙명처럼 덧씌워야만 하는지 가슴이 아팠습니다.

스물 무렵에는 평화통일이 큰소리로 부르짖으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줄 알았었지요. 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서로 "그만 싸우자" 손 내밀면 휴전 모드가 종결될 줄 알았었지요. 어쩌다 보니 한 민족이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통일을 원한다면 사상이나 이념이 무어 그리 대수일까 싶었지요.

하지만, 어느새 지천명(知天命)이 가까워지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통일은 더욱더 요원해지고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국방과 안보라는 명분의 강대국의 잇속 놀음의 희생양이 된 우리는 점점 늘어나는 국방비 감당에 허덕이고 있으며,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푸른 청춘의 상당 시간을 상처받으면서 또 때로는 상처를 주면서 아프게 견뎌야만 합니다.

누군가는 군대라는 특수 상황에서 어른스러워지고 남자다워진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미 세월을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른이 되는 일이 얼마나 가혹한 부대낌이었으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지레 포기해야만 하는지 잘 알 것입니다. 어른스러워진다는 것이 호시탐탐 기회나 엿보는 기회주의자에 철저한 이기심으로 무장하여 제 밥그릇 잘 챙기고 사는 것이 돼버린 현실을 우리는 아이들에게 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각종 사건사고가 이어지는 어수선한 현 시국은 더 이상 믿지 못할 언론과 항간을 떠도는 SNS의 무성한 소문들까지 더해져 국민들을 자폐(自斃)로 내몰고 있지요.
요즈음의 상황을 보면서 내가 꿈꾸고 바라왔던 역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세상을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만 한다는 현실이 낯부끄러울 따름이며, 세상이 꿈꾸는 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맑은 눈빛들을 마주할 때면 "무엇 하느라 요따위 시절을 물려주느냐"며 타박할 것만 같아서 차마 눈을 마주할 수가 없는 시절입니다.

아이를 훈련소에 놓고 돌아와 몇 날을 뒤척여본 어미라면 이 땅의 분단 상황으로 인한 역사적 시점이 모두의 가슴에 얼마나 큰 멍에가 되고 있는지 실감할 것입니다. 매스컴에서 남의 나라 이야기하듯 떠드는 남북문제와 강대국들의 패권주의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제는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무차별로 쏟아지는 세간의 소식들이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되어 더 이상 맨 가슴으로는 차마 마주할 수 없는 지경에서 이르러서도 오직 자신의 잇속으로만 세상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이 되려 인간적으로 평가받는 현실 앞에서 "더불어 산다."라는 표현조차 이율배반(二律背反)이 되고 이적(利敵)으로 간주되어 감히 명분이나 도덕을 운운했다가는 덜떨어진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고 마는 현실에 어지럼증이 납니다.

세상의 모든 목숨은 빈부귀천이 없으며 자연의 품에 사는 하나의 생명일 뿐이건만 자본의 노예화가 가속되고 있는 문명의 이기(利己) 속에서 현대인들은 갈수록 호희 호식(好衣好食)에 눈먼 단세포 의식구조로 퇴화되었고, 자신의 관념마저 불신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에 정치적 혼돈과 사회적 혼란이 더해지면서, 권력 찬탈과 유지를 위한 파벌 다툼의 틈새에서 제 욕망 채우기에 급급한 문명의 사이보그가 되어 버린 이 땅에서 더 이상 "생명존중"이나 "자연 순응"이란 단어는 이상향을 꿈꾸는 뜬구름과 동일시되었지요.

한낮이 되어도 희뿌연 안개와 연무로 인해 도심의 하늘은 며칠째 파란빛이라고는 기척도 없고
후덥지근한 대기는 늪지를 떠도는 괴괴함으로 나무 이파리 한 조각 흔들지 못한 채 박제가 되어 버린 풍경 속에서 문을 열고나서면 개미지옥의 어느 모퉁이에 처박혀 돌아 나오는 길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은 막막함이 엄습하는 시절이지만, 우리는 분별의 고삐를 바짝 그러쥐어야 할 것입니다. (2014. 6.25, 전미희)

전미혜 시인은
전미혜 선생님은
광주에서 '종이사랑'이라는 공방을 운영하고 있으며, 대학과 문화센타 등지에서 종이공예를 강의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편 시인이다. 탁월한 시상과 글맛으로 시를 쓰고 있으며, 빛고을에서 유명한 시인이다. (그는 '평등사회만들기' 운동가로 학연, 지연, 학력 등을 통한 연줄 사회를 배척한다. 하여 일체 그런 이력을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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