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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홍원준 논객 칼럼

다름과 틀림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권

by anarchopists 2019. 11. 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1/09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다름’과 ‘틀림’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권에 대한 단상


  '다르다'와 '틀리다'는 분명 엄연히 다른 동사이다. 사전적으로 그것의 의미를 보면 '다르다'는 '서로 같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물 두 가지가 있다고 가정하였을 때 비슷하지만 어떤 특징에 있어서 구분되는 것이 존재하거나 전혀 다른 특징으로 인해 구별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좋고 나쁨이나 선하고 악하다는 기준이 아닌 그저 그 해당의 것을 구별하는 특징의 요소일 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어떤 두 가지 것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로 그 두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점은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외적인 것에 한정된 관점이 아니라 근원적인 것(생각, 가치관 등과 같은 것)부터 정말 사소한 것까지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사람의 시선이기에 우위, 선후, 선악, 호불호는 따질 수가 없다. 즉, '다른 것'은 그저 다르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하며 이러한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다름 또한 인정받을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틀리다'는 '(계산, 예측, 사실 따위가) 맞지 않고 어긋나다.', '올바르지 못하고 삐뚤어지다.'는 뜻이다. 논리, 원인과 결과, 진실, 도덕의 기준으로서 합당(합리)하지 못할 경우 쓸 수 있는 동사이다. '틀린 것'은 이러한 오류를 범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나 인간이 그것을 지양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틀린 것'은 더 이상 그것을 언급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막는 엄청난 권위이며 권력이다. 이러한 오류를 만들어내기 위한 기준은 당시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산물로 분명 한계를 가지지만 그 시대의 사회에서는 너무나 자명하게 통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수학적 법칙이나 알고리즘처럼 말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다르다'와 '틀리다'가 혼용된 채 쓰이고 있다. 부모가 자신의 자식과 다른 집의 자식을 비
교하면서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내 친구네 자식은 어떻게 해서 공부도 잘하고 예의도 바른데 너는 도대체 뭐하는 거니?" 이 경우 '공부를 잘하고 못함'이라는 다름에 관한 것을 '예의가 있고 없음'인 틀림의 기준과 혼용하여 자식에게 꾸지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 예에서 '공부를 잘하고 못함'이 틀림의 기준이 되어 옳고 그름이나 논리적 오류의 근거로 작용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는 '공부를 잘하고 못함'이라는 것이 사회적 구조에 의해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틀린 것'의 기준으로 변모한 것이다. 자식이 정말 다른 것에 흥미가 있어 공부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이 되어버린 경우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개인의 가치관에 대하여 위 사례처럼 '다름'과 '틀림'을 혼용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사회의 어떠한 주류적인 시선이 있다. 그러나 분명 이에 부합하지 않은 다른 시선을 가진 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럴 경우 사회 권력은 주류를 위해 비주류를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분명 이는 어떤 사안이나 무엇인가에 대하여 바라보는 관점이 '다름'으로 생겨나는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틀림'이라고 한다. 이러한 결과로 생겨나는 해괴한 상황에 마주하게 된다. 비교하지 못할 것을 비교하게 되어 차이가 아닌 옳고 그름을 말하게 되는 상황이다. 성적 소수자의 경우 그들의 취향은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들의 차이점이다. 지금도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지 못한 채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비교하는 어처구니없고 말이 안 되는 경우가 버젓이 있다.


  이처럼 현대에 '다름'과 '틀림'을 혼용하여 표현하는 인간들은 단순히 말실수나 어휘적 오류가 아니다. 분명 당대 인간의 사유구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서 사회의 주류적 시선에 머물지 않고 비주류적 시선을 나타내는 것은 '다름'이 아닌 '틀림'이라는 것이다. 주류와 멀어지면 그것은 '틀린 것'이 됨으로서 사회에서 지양되고 도태되며 사장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다름'과 '틀림'조차 구별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어찌 인권을 말할 수 있으며 어찌 다양성을 말할 수 있을까.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는 실존적 자각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실존이 만들어낸 사회적 구조의 한계를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홍원준 필자는
숭실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평소 사회, 정치, 문화 등에 비판적 의식을 견지해왔습니다.

그래서 의생명시스템학과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꿀 정도로 존재, 사유, 실존, 본래성 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철학도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철학의 인식론을 중심으로 촘스키와 같은 언어철학자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젊은이로서, 우리 사회 진보에 대한 대안제시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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