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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논쟁] 함석헌과 사회진화론 9

by anarchopists 2020. 1. 2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08 20:39]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사회진화론(9)
- 함석헌은 사회(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

6. 맺는 말 (2)
일제와 나치 독일의 정치적 오용을 스펜서와 결부시키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에서 나온 오독이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장주의가 대세인 시대에 스펜서는 주저 없이 강력한 반대를 표명하였다. 또한 스펜서는 정부가 개인 자유를 침해하도록 허용하거나 군사조직이 너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놔두는 것을 경고하였으므로 20세기에 등장한 전체주의 체제를 용납할 리가 없다. ‘우승열패’를 내세웠다는 헉슬리(T.H. Huxley), 워드(L. Ward) 등 사회 다윈주의자로 분류된 학자들도 자연선택의 사회적 함의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자연적 불평등 관념을 받아들였지만, 이들은 동시에 사회개혁가들이었다.

인류는 개인이 아니고 사회(전체)가 단위가 되어 진화해가야 한다’는 함석헌의 소신은 진정한 사회진화론이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은 단순한 발전이나 변화에 성이 안 차서 개혁을 넘어 혁명을 평생 부르짖었다. 그가 밝힌 대로, 혁명(revolution)은 진화(evolution)의 재현(re-evolve)이다.

“생명이 산 것인 이상 꼴 속에는 진화(evolution)가 아무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evolution만이 아니고 revolution이 있게 된 것은 생각 때문이다. 혁명은 생각해서 스스로 하는 진화다. ‘re’에 뜻이 있다.”


함석헌이 지향하는 혁명은 물질발달이 아니고 정신의 진화, 정신혁명이다. 이 점에서 함석헌은 근대 한국종교에서 말하는 '정신개벽'의 전통에 서있다. 서양사상의 맥락에서 그는 정신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인 정신권(또는 人智圈noosphere)과 오메가 포인트', 초인간(ultra-human)을 말한 샤르뎅의 통찰에 동조한다. 나아가 인지권은 사람화(化), ‘영화’(靈化)(hominisation)(spiritualization)를 촉진하는 변용(變容)인자로서 작용한다. 이 ‘영화’를, 줄리안 헉슬리는 “점진적인 정신사회적 진화‘(progressive psychosocial evolution)”로 해석한다. 사회진화의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함석헌도 정신과 영의 차원을 강조하고 새 사람, 새 인류를 희구하는 점에서 샤르뎅과 상통한다. 함석헌은 개인보다 ’전체‘와 사회를 더 중시하는 사상을 심화하는 과정에서 샤르뎅의 영향을 받았다. 샤르뎅의 『인간현상』에서도 전체론적인 입장이 개진된다. “우리는 그래서 전체 집단의 영화(靈化)에 의하여 개체의 인격화(personalisation)에 이른다.” 이 맥락에서도 사회진화가 함석헌의 사유체계를 벗어난 개념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문제제기의 방식과 내용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의식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마치 사회진화론이 기피해야할 말처럼 부정적으로만 기술되어온 이 잘못된 상식(몰상식)은 우리 사회의 지식수준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단면이다. 새 지식의 공백상태가 1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것이다. 그동안 전개된 서양의 사회진화 이론을 일체 도입하지 못하게 막은 셈이 된다. 그렇다면 인문과학적, 사회과학적 차원에서 한국사회의 정체는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의 자본주의와 북한의 공산주의도 원래의 취지조차 살리지 못하고 새로운 틀과 방법론을 거부해왔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에 유례가 없이 양극화와 재벌화가 날로 심해가고 분단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 아닌가.

요컨대, 일방적인 사회진화론 해석은 그 발원지인 서양의 사상사나 개념발전사에도 어긋날 뿐 더러 함석헌의 말씀(text)이나 맥락(context) 어느 쪽과도 부합하지 않는 낡은 지식, 그야말로 개화시대에나 가능한 주장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말하면 186시대에 속한다고 할까. 하드웨어를 두고 소프트웨어가 못 따라가는 식이다. 하드웨어조차 급속히 진화하고 있다.)

함석헌은 어떤 낡은 말이라도 건져 올려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활용했다. 예를 들면, 군주시대의 용어인 ‘백성’을 들 수 있다. 다원주의 시대에 합당한 말로 재해석했다. 함석헌은 또 전체주의’를 전체론(holism)의 의미로 스스럼없이 사용했다. 사회진화와도 관련되는 개념이다. 이제는 개인구원이 아니고 사회구원을 말할 때라는 것이다. 진화하면 구원이 온다. 진화가 곧 구원이다. 그러므로 사회진화는 사회구원이다 ‘씨알’도 함석헌이 건져 올린 귀중한 말이다. 그 개념 속에 동서철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온고지신’의 표본이다.

개념의 축소와 오해는 바로, 이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양의 (그리고 일본의) 제국구주의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속에 함몰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이제 새로운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징후로 봐서 단순한 발전이나 단선적인 진보로는 이미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 바로 창조적 진화가 요청되는, 새 개벽을 기다리는 역사의 한 순간일 것이다. 오늘의 논쟁을 내다보듯 함석헌이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궁극에 생명은 한 생명이요 그 생명이 무한히 진화하는 생명임을 알면 그것 때문에 싸울 필요는 없다.”(전집 13:185-6)  이제는 싸움보다 실천이다. 진화하는 사회라야 산다! (김영호 끝)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그 동안 꾸준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운영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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