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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논쟁] 함석헌과 사회진화론 7

by anarchopists 2020. 1. 2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06 06:38]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사회진화론(7)
-함석헌은 사회(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

5. 사회진화론의 동아시아적 변종과 혼동(2)
또 하나, 간접적이지만, ‘사회진화론’과 함석헌의 접촉점은 민족개조론이다. 사회진화론에 충실한 윤치호(1865-1945)는 인종개선을 이루지 못하면 한민족의 ‘멸종’을 의미하게 된다고 생각했다.(249) 비슷한 맥락에서 후에 (1920년대) 이광수도 민족개조론을 주장하게 된다. 그보다 훨씬 뒤이지만 함석헌도 나중에 민족/민족성개조론을 폈다. 그것은 그가 사회현실 속에서 절감하기도 했지만 역사해석자로서 민족사를 다시 읽으면서 도달한 입장이었다. 그는 이조의 당쟁을 “민족의 생명력을 먹어치우는” 고질병으로 진단하고 한탄한다. 그 해결책으로 잃어버린 민족적 자아를 찾아내고 민족성을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그도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 된다. 이 점에서 함석헌은 영락없이 ‘사회진화론자’로 분류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문제 제기자는 저자(박노자)를 먼저 비판했어야 했다.


나는 박노자교수가 근래 발표했던 글 속에서 함석헌의 ‘민중’이 계급성을 무시했다는 비판에 대해서 그 부적절함을 지적한 적이 있다. 함석헌은 역사기술에서 계급사관을 거부한다. "인생의 모든 일을 이해관계의 대립으로부터 오는 계급투쟁으로 다 설명하려는 것은 분명한 독단이다.,,, 역사를 메는 것은 개인도 계급도 아니요 민족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전집1:68-9) 그 민족 보존을 위해서, 적이 사용하는 민족주의와 사회 다윈주의의 무기를 우리도 사용해야한다고 하기로소니 그리도 나쁘다고 할 것인가. 함석헌의 ‘민중’은 피지배계층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민중’이 진화한 ‘씨알’은 더 포괄적으로 확대되어, 말하자면 지배계층까지 포용한 개념이 된다. '마르크스주의 사학도'로 자처하는(471) 박교수의 좁은 시각과는 다른 차원이다.

함석헌이 개화기의 ‘사회진화론’자와 다르다는 사실은 그가 국가주의와 집단주의를 배격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국가주의는 인류가 진화 단계에서 벗어버려야 할 뱀허물 같은 것이다. 조선 개화파는, 중국의 량치차오나 일본의 가토와 비슷하게, 국가주의와 집단주의를 받들었다.(237) 이들은 개인주의를 앞세우는 스펜서가 대표하는 영국의 ‘원본’ 사회진화론과도 다르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진화론’조차 한 가지 형태가 아니다.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은, 사회진화론의 맥락에서, ‘연대주의’를 강조했다. 함석헌은 사회진화와 관련하여 크로포트킨의 입장을 ‘연대’ 대신 ‘협조’로 표현했다.

어느 이론이나 그렇듯이, 이 이론 자체의 변화/진화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한 가지 형태만 만고불변하는 진리로 추켜들고 그것만 정통이고 다른 것은 이단이라 하는 것은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일이다. 저자도 저술의 말미에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또는 그 단점들)와 힘의 이념이 (헤겔식)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지양될 것으로 기대한다.(492) 실제로 사회진화론 발전사에서 헤겔(1770-1831)은 고전 사회진화론의 선구자로 분류된다. 함석헌도 동서의 문제를 변증법적인 발전, 진화로 푼다. "이제 당한 문제는 동서종합을 하는 데서 한 단 높은 새 지경에 오르는 일이다."(전집1:62)


변증법적이든 다른 식이든 간에, 함석헌의 관점에서, 발전, 진화한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다만 발전이나 진화의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생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전체'라고, 또는 둘을 합쳐서 '온 생명'이라 할만도 하다. 나는 다만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사회'라고 한 것이다. 그래야 진화를 촉진하는 현실적인 방법론이 도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다른 어떤 집합 개념보다 변화의 단위로 더 적합하다. 사실 20세기 초에 두 가지(사회진화론과 사회 다윈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스펜서도 1930년대에 와서야 주로 미국 쪽에서 사회 다윈주의자로 분류되었다. 그것은 스펜서에게 그럴만한 측면과 양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개화기 이후 서구에서 전개된 사회진화 담론의 전반적인 발전을 참고하여 구분하면서 기술했더라면 지금의 혼동을 피하고 더 선명한 그림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다만, 저자가 올바로 이해했을 수도 있다는 기술이 있다. 한 대목(63)에서 ‘사회진화론’을 ‘social Darwinism'과 일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단편적인 지적을 빼고는, 전체적으로 총론적인 사회진화론과 구분하거나 이후에 발전된 이론을 전혀 반영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개화기의 오독을 그대로 옮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저술에 의탁해서 공격한 비판자는 이중의 무비판적 수용의 오류를 범한 셈이다.)

어떻거나 20세기 초반전후의 동아시아에서의 사회진화 담론이 그 이후 그 이론 자체에 대한 발상지 서구에서의 해석과 전개를 전혀 참고하지 않은 채 한국사회의 21세기 현실에 적용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거의 한 세기 동안의 발전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런 수정, 보충과정 없이 백 년 동안의 공백기를 지나 그대로 재등장한 셈이다. 당시의 역사 기술을 넘어서 그대로 오늘의 현실을 조명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무리한 짓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다른 자료집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한글판 '위키백과' ('사회진화론')'를 보면 알 수 있다. 영어판(Wikipedia) 내용과 전혀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영어판의 다양한 내용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한국인 필자가 일방적으로 단축, 재구성한 내용이다. 그 내용은 영어판의 '사회진화'(social evolution) 항목이 아니고 '사회 다윈주의'(social Darwinism) 항목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어느 항목에도 충실하지 않다. 이것이 (일부) 한국지식인들의 상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모든 한국독자가 여전히 오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론을 말할 때 현실적으로 인간사회에서 경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것인가는 간단히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경쟁은 현실이고 평등은 이상이다. 현실과 이상, 두 지점사이에서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가 걷는 도정이다. 20세기 초 개화파에게는 사회 다윈주의(‘사회진화론’)와 민족주의 이외에 별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침입해 들어오는 강자인 서구 열강이 도구로 삼고 있는 듯 보이는 이론을 바로 자신의 방어무기로 활용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보았다. (김영호, 끝)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그동안 김영호 선생님의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을 읽어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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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포럼은 <같이살기 평화운동>(대표 김제태 목사)과 함께
<함석헌학회>의 창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이 나라가 가져야 할 사상적 뿌리를 심어주고
인류에게 평화적 정서를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학회>가 4월 16일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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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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