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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논쟁] 함석헌과 사회진화론 8

by anarchopists 2020. 1. 2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07 06:54]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사회진화론
-함석헌은 사회진화론을 말하지 않았는가-

6. 맺는 말 (1)
위에서 우리는 ‘사회진화’의 참 뜻과 보편성을 논증하기 위하여 서구에서 발전된 이론의 배경을 두루 살펴보았다. 나는 ‘(개인이나 계층, 집단보다는) 사회(전체)가 기본단위가 되어 인류는 발전, 진화(해야)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사회진화‘를 말했다. 특정한 것만 알고 그들만의 전문용어를 전용하는 것을 즐기는 학자나 사이비학자를 제외하고는, ‘사회진화’ 하면 누구라도 떠 올릴 수 있는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상의 한 가지 형태나 변종만을 고집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부분적 진리를 전체적 진리로 착각하는 일반화의 오류이다. 원효는 이것을 편견(偏見), 편집(偏執)이라 했다. 이것이 고질화되면 편집증(偏執症)(paranoia)이 된다.

더구나 모든 개념이나 사상의 근거를 서구전통에만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묻는다. 서구 개념을 일본 사람들의 편향적, 정치적 해석에 따라서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은 학문이 아니고 편벽된 맹신이다. ‘학문’은 배우고(학(學)) 묻는 것(問)이다. '사회'와 '진화'는 우리말이고 우리 사고 속에 착근되어 있는 개념이다. 그 말의 알맹이는 이미 채워져 있거나 새로 채워 넣어야 한다. 함석헌의 경우에도 ‘씨알’이나 ‘하나님’(신관) 등 개념에서도 나타나듯이, 한 개념이나 용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천한다. 진화론조차 예외가 아니다. 말하자면 진화론도 진화한다. 컴퓨터 프로그램도 새로운 버전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컴퓨터도 자동차도 진화해왔다. ‘사회진화’가 ‘사회’가 ‘진화’될 수 없고 퇴행하거나 정체한다는 것을 암시한다면 반어적 표현이 된다. ‘사회가 진화한다’는 현상론이나 현실론에는 찬동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진화해야한다’는 당위론이나 이상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짓이다.

함석헌이 사회진화론자가 될 수 없다면 어떤 입장에 서있다는 것인가. 진화냐, 퇴화(퇴행)냐, 정체(停滯)냐 하는 측면에서 볼 때, 개체진화론자, 사회퇴화론자, 아니면 개체퇴화론자인가. 또는 개체정체론자나 사회정체론자에 속하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대안이 없는 공허한 색깔론일 뿐이다. 어떤 입장이건 주장과 해석의 문제로 귀착한다. 사회개혁론, 사회발전론이 성립된다면 사회진화론도 성립된다. 개혁, 발전, 진화는 비슷한 속성을 지닌 일반 개념들이다. 다만 구체적으로 하나하나의 실천을 위한 방법론이 다를 뿐이다. 비판대상으로 삼는 ‘사회진화론’(사회 다윈주의)은 사실은 진정한 사회진화론이 아니다. 무한경쟁, 우승열패, 인종차별 같은 부정적인 요소를 지닌 원리가 결코 사회진화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명실상부한 명칭이 아니다. 함석헌의 경우, 단순명료한, 군더더기 없는 명제이다.

함석헌이 ‘평생을 사회진화론과 싸웠다’는 것은 그의 저술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함석헌이 결국 우찌무라를 떠난 것도 후자의 국가주의적 입장 때문이었다. ‘사회진화론’과 무관하다. 이러한 해석은 함석헌 사상의 이해 수준이 어디에 와있는가를 말해준다. 함석헌의 말씀(텍스트)을 두고 생명진화냐, 사회진화냐, 창조적 진화냐, 또는 어떠한 다른 진화냐 하는 것은 해석자의 해석학적 또는 전략적인 용어선택의 문제이다. 함석헌이, 베르그송처럼 ‘창조적 진화론’이나 또는 ‘생명 진화론’의 입장에 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는 ‘한 생명,’ ‘온 생명’을 강조한다. 생태환경이 중요한 주제가 되어 있는 시기에 ‘생명’ 개념은 전략적으로도 유익하고 필요한 개념이다. (아울러 베르그송도 처음에 허버트 스펜서의 제자로 출발하였고 해석자에 따라서는 사회진화론자나 사회 다윈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생명’이 아직도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라면 ‘사회’는 좀 더 구체적 현실을 표상한다. 나의 해석은 '한 생명' 즉 전체생명을 중시한다. 그래서 함석헌의 입장을 더 구체적으로 전체론적인 사회진화론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회’는 나의 전략적 선택이다. 특히 이념적 대립으로 갈라진 한국사회에서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는 이 말을 강조할 필요를 느낀다. 사회주의, 사회복지, 사회민주주의는 나의 관심사이다

문제로 삼은 ‘사회진화론’은 사실상 사회 다윈주의(social Darwinism)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사회진화론의 한 변종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사회진화론과 구분되어야 한다. 우생학적인 요소가 일부 내포된 다윈주의가 한 때 등장했다고 하여 총체적인 틀로서 사회진화론이 부정되거나 용도폐기된 것은 절대 아니다. '진화'는 반드시 다윈이 제안한 생물학적 진화로만 삼을 수 없다. 함석헌이 그렇게 보고 해석했듯이 (그리고 켄 윌버 같은 이 시대의 선각자도 관찰했듯이) 역사를 놓고 보면 전체 사회나 공동체 전체가 진화해 온 것이 사실이고, 샤르뎅이 내다보았듯이, 앞으로도 더 차원 높은 영성을 향하여 상승하리라 예상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류의 이상으로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김영호, 내일 끝맺습니다.)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송구합니다.
아직 맺음글을 싣지 않고 감용호 선생님의 글이 끝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용서를  빕니다. - 운영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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