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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논쟁] 함석헌과 사회진화론 2

by anarchopists 2020. 1. 2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3/31 06:1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사회진화론
- 함석헌은 사회(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

2. 함석헌의 입장

왜 나는 함석헌이 ‘사회진화’를 주장한다고 말하는가. 이 담론은 서양에서 ‘사회진화론’이나 더 포괄적으로 사회문화진화론(sociocultural evolutionism)에 해당한다. 문제가 된다고 보는 '사회진화론'은 '사회'와 '진화'의 두 실명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분리해서, 진화는 우선 생물학적 진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영국에서 전개된 사회진화론처럼 생물진화와 사회진화는 함석헌의 사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스펜서는 다윈이 생물진화학설을 발표하기 전에 이미 일반 진화론을 정립하였지만 다윈의 학설을 보고 '존재하기 위한 투쟁'을 '(최)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으로 해석하면서 그의 이론을 강화시켰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함석헌은 창조론을 지지하면서 생물진화론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를 진화론자라 해서 창조론을 배격하는 이로 보는 것은 단순 논리이다. 함석헌에게 두 가지가 모순, 상극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관계에서 양립될 수 있다. 조화와 회통을 추구하는 한국정신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신종은 변화만이 아니요, 창조다. 물적 현상으로 하면 만물은 진화된 것이요, 그 근본의미로 하면 각각 특수적으로 창조된 것이다."(저작집 17:106) 또한 함석헌은 '인류 진화'를 거듭 말한다.(17:112-3, 115) “우리는 단순히 세계의 발달만 아니라, 위에서 말한 대로 새 인류가 나타날 가능성까지도 내다보고 있는 이 진화의 시점”이다(전집 2:31)

이처럼 함석헌이 모든 형태의 진화를 일정한 측면에서 인정한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와 동시에, 두 가지 진화론이 유관하지만, 사회진화론은 그것 자체로도 독립적인 맥락과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진화는 발전, 진보보다 단계가 높은 차원을 함의한다고 보면 된다. 사회발전이나 사회진보를 말하는 것처럼 사회진화론을 말할 수 있다.

“이 신관의 발달을 두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적 정신발달의 면에서이고, 하나는 역사적 사회진화의 면에서입니다. 사람의 정신발달 과정을 보면, 소박하고 단순하게 구체적, 현실적인 것에 붙은 데서부터 점점 추상적, 정신적인 것으로 자라나갑니다.... 사회의 역사적 발달을 보면 거기서도 마지막에는 인격적 자각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저작집 17:244)

사람마다 신관이 다르듯 함석헌의 하나님도 독특하다. 신은 정체된,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있는 이”(자존하는 자)(What I am)(여호와)에서 “... 있으려는 자”(What I shall be)로 바뀐다. 신도 인간과 사회와 더불어 진화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가 된다. 함석헌이 사회를 경시하거나 기피했다는 것인가. 그는 끈질기게 개인보다 사회를 강조했다.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전체주의'(전체론 holism)를 강조했다. 그에게 사회와 전체는 같은 말이다. 그는 '전체주의' 속에서 개인과 사회가 다 보존 될 수 있다고 본다.

"개인의 정말 발달은 전체가 개체 안에 있고 개체가 전체 안에 있는 사회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국가주의를 배격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금 국가가 전체를 가장하고 속이는 그 우상숭배주의 때문에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영적 에너지는 얼마나 쓸데없이 소모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세계의 발달만 아니라 위에서 말한 대로 새 인류가 나타날 가능성까지도 내다보고 있는 이 진화의 시점인데, 그러한 돌변화는 개체의 자유가 절대로 보장이 되는 전체 안에서만, 말을 바꾸어 한다면 생각을 전체로써 하는 사회에서만 될 수 있습니다."(전집 2:31)

개체의 희생을 대가로 하지 않는 유기론적인 전체론을 말한다. "이 우주 안에는 허다한 만물이 그것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가지고 있습니다. 진화의 계단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관계는 더 복잡하고 긴밀해집니다."(전집 10:199) 여기에 스펜서의 진화론에 내포되어 있는 우주론적 측면과 단순화-복잡화 이행과정이 함축되어있다. (부정적인 ‘사회진화론’의 선구자라는 스펜서와 함석헌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만은 아니다.)

함석헌은 개인/개체와 별개로 ‘전체’의 존재를 가정한다. 전체는 개체들의 총합만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이다. “전체는 부분의 모아놓은 것보다도 크다.”(전집 14:335) “부분이 있어야 전체가 있지만 전체는 부분의 총합만은 아니다.”(9:298) 이것은 콩트(Compte)와 더불어 사회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두르켐(Emile Durkheim 1858-1917)이 정의한 ‘사회’와 우연히 그대로 일치한다. 함석헌 나름의 통찰이 여기서도 두드러진다.

함석헌은 종교적으로 개인구원을 부정하고 사회구원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정도로 혁명적, 종교개혁적이었다. 전체론적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전통적 신학을 완전히 벗어난 새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함석헌은 “펜들힐의 명상”에서 예수를 가롯 유다를 찾으러 지옥에 파견하기까지 한다.) “이제 전체의 구원 없이 개인의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의 나라란 개체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개체인 지경입니다. 거기 너 나도 없고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이제 역사는 거기를 지향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전집8:383-85)


전체는 곧 전체사회, 인류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생각하는 주체는 개인이었지만, 앞으로 인류 살림의 생각하는 주체는 커뮤니티이다, 그런 역사의 진화단계가 지금이다.”(전집 9:389-90) 사회구원은 곧 사회진화의 종교적 표현이다. 사회구원이 타율적인 함의를 지닌 것이라면 사회진화는 공동체적인 것이다.

함석헌이 말하는 진화는 단순한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다. 생명과 정신을 내용으로 한 인간전체, 인류사회전체를 대상으로 한 탈바꿈, 개벽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회진화(론)’은 전략적으로 선택한 말이다.(김영호 내일계속)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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