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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논쟁] 함석헌과 사회진화론 3

by anarchopists 2020. 1. 2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01 07: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사회진화론
- 함석헌은 사회(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

3. 서구 이론의 해석 문제

가. 사회 다윈주의 - 이론의 다면성
이미 언급한대로 반론자가 오해하고 공격하는 입장은 사실상 사회진화론 일반이 아니고 사회 다윈주의(social Darwinism)에 해당하는 것이다. (후자를 전자의 변종이라 해도 좋다.) 그 이론조차, 모든 이론이 대개 그렇듯이, 부정적인 일면만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모든 사회이론은 그 동기에 있어서 사회발전의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이다. 잘못된 정치적 해석과 실천은 다른 문제이다. 나아가서 함석헌조차도 다윈주의가 제시한 전제와 내용의 어느 부분들을 우연히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 다윈주의만 해도 내용과 상반될 정도로 다양하여 정의하기도 쉽지 않다. 한 가지 통용될만한 정의는 “모든 개인들, 단체들, 나라들, 또는 관념들 간의 경쟁이 인간사회에서 사회진화를 촉진시킨다는 개념에 기초한 여러 가지 이념들”이다. 이 정의에서 ‘경쟁’이 키워드가 된다. 다윈이 제시한 ‘자연 선택’의 개념과 그리고 이것을 해석하여 스펜서가 사용한 ‘적자생존’을 얼마나 중시하느냐에 따라 사회학적 방법이나 정치적 이론의 적용이 다를 수 있다. '사회 다윈주의자‘는 자유방임주의 옹호자가 될 수도 있고 국가 사회주의 옹호자가 될 수도 있으며, 제국주의자가 되거나 우생학 옹호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경쟁’ 자체가 언제나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만 할 수 없다. ‘선의의 경쟁’도 있다. 민주주의와 더불어 근대 및 현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온 자본주의가 기초를 둔 경쟁은 결과론적으로야 어떻든, (성악설의 경우처럼) 동물과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을 반영한 측면이 있다. 각종 스포츠는 경쟁을 원리로 참여자와 관전자에게 즐거움과 건강을 가져다준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성서적 이치와도 통한다. 인간사회에서 경쟁은 없앨 수 없으므로 완화해가고 그 결과가 차별의 원인이 되지 않게 하면 된다. 과도한 경쟁을 유발시켜 능력에 따른 인간차별과 개인 및 사회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절제와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사회적, 정치적인 통제가 없는 채 양극화가 심화되고 교육에서 경쟁이 가열되는 비정상적인 사회로 치닫고 있으므로, 평등의 가치가 선양되고 제도화되어 선진 국가들처럼 복지사회로 진화해가야 한다.

실제로 서구에서 사회 다윈주의의 다양한 발전 및 적용 과정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많이 발견된다. 다윈주의는 다윈의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다윈만이 아니라 또한 허버트 스펜서, 인구론의 저자 토마스 말서스 (Thomas Malthus), 그리고 다윈의 조카인, 우생학의 창시자 프란시스 갈톤(Francis Galton)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들이 오늘의 가치관의 관점에서 꼭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없다. 다윈주의는 다윈이 내세운 ‘자연 선택’ 이론의 사회적 적용으로서, 자연 선택은 제한된 자원 때문에 개체들 간에 경쟁이 일어나서 인구 속에 신종이 발달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경쟁’은 어디까지나 자연 현상을 두고 관찰한 결과 찾아낸 이치이다. 이 자연법칙을 인류에게 얼마큼 적용할 수 있느냐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스펜서도 사실 그의 사후 한참 지나서 1930년대까지는 사회 다윈주의자로 기술되지 않았다.

다윈 자신도 갈톤의 우생학적인 작업을 진지하게 검토했으나 후자의 “유전적 개선”(hereditary improvement)론은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보았다. 사람들이 그러한 선택을 당연히 거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강제적인 저속한 방안이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882년의 저술에서 다윈은 의학의 발전이 약자들로 하여금 더 생존하고 가족을 거느리게 할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기술했다. 우리는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자연 선택을 통해서 '사회적 본능'의 일부로서, '도덕 감정'(moral sentiments)이나 양심과 더불어, '동정(sympathy)의 본능'을 가지게 되므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놔두고 볼 수는 없다. 다윈은 심지어 사회적 본능을 지닌 어떤 동물이라도, 인간처럼 지적 역량도 개발된다면, 결국 도덕 감정이나 양심을 획득하게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약자들을 의도적으로 방기하는 것은 일시적인 혜택을 받을 뿐, 악독한 짓이다. 약자가 생존하여 자손을 퍼트리는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져야한다. (함석헌은 “병신자식도 내 자식”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다만 한 가지 방책이 있다면 심신이 약한 자는 결혼을 마음대로 못하게 하거나 자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덜 적합한' (less fit) 사회구성원들이 '더 적합한'(more fit) 자들보다 더 출산율이 높아지는 것을 걱정한 갈톤에 대한 다윈의 대안 제시이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20세기에 시도된 것과 같은 어떤 우생학적 정책도 옹호하지 않았다. 정부가 개입하는 어떤 형태의 강제도 그들의 정치적인 견해와는 상반되기 때문이었다.


사회 다윈주의는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에 의하여 더 알려지고 '발생반복'(recapitulation) 이론이 제시되었다. 발생반복은 개체 조직체의 발생과정에서 조상의 유형들과 같은 일련의 단계가 일어나서 즉 개체발생(ontogeny)이 그 집단의 계통발생(phylogeny)을 반복한다는 가설이다. 이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상통한다. 다윈은 제한된 자연자원에 대한 투쟁과정에서 좀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진 개체가 더 생존할 가능성이 더 많아져서 그러한 성향들이 시간이 가면서 인구 속에 축적되어 어떤 환경 속에서는 자손들이 마치 새로운 종(species)처럼 보일 정도로 달라진다고 믿었다. 이것을 사회 다윈주의자들은 우생학적으로 해석하였다. 스펜서는 "모든 아이들에게 인류가 축적해온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는 경향이 같은 순서대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이 관찰은 우생학적 인종차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인류전체를 말하는 것이지 인종별로 구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펜서(1820-1903)는 그 시대의 분위기가 제국주의와 확장주의였으나 그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표명했다. 인종차별 등 정치적 오용은 뒤에 일어난 일이다.

여기서 지적할 것은 함석헌이 이 개념('조성반복')을 자주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것을 역사과정에 적용한다. (다만 그는 제랄드 허드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함석헌도 사회 다윈주의자가 된 셈이 아닌가. 이 개념을 인용한 허드(Gerald Heard 1889-1971)는 한 때 퀘이커였던 평화주의자로서 우생학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인 입장에 동조했을 리가 없다. 함석헌도 마찬가지다. 그는 같은 진화론을 놓고 ‘생존경쟁’이냐 ‘협조’냐 달리 본 것은 해석자의 시각의 차이로 보았다. 사회 다윈주의자는 국가 간의 무역과 협력이 순수한 경쟁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다.

사회 다윈주의 자체가 반드시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나치와 시회 다윈주의의 관련을 놓고도 이견이 있다.) 다윈주의자는 사람에 따라 진보, 퇴보, 또는 개혁정치, 어느 쪽이나 지지할 수 있다. 그만큼 사회 다윈주의자체도 한 면으로만이 아니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하물며 그보다 더 포괄적인 사회진화론에 있어서랴.(김영호, 내일 계속)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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