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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논쟁] 함석헌과 사회진화론 1

by anarchopists 2020. 1. 2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3/30 14:23]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사회진화론
- 함석헌은 사회(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

1. 머리말 - 문제제기의 무실체성과 비논리성

최근에 함석헌이 ‘사회진화론자’이냐 아니냐를 두고 함석헌 관련 서클에서 야단법석이 일고 있다. 필자가 쓴 글(한길사,『함석헌저작집』1권, “저작집 발간에 부쳐”)에서 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라고 기술한 것에 대해서 반론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한 아마추어 역사학자에서부터 이 시대 논객 중의 한 사람인 김상봉에 이르기까지 소동이 번지고 있다.) 나는 문제제기의 방식과 내용에서 학술과 상식을 벗어난 것이어서 해명할 가치가 없다는 공감대 속에서 침묵하고 있었지만, 개인 차원을 넘어서서 마치 이 한 표현이 함석헌 사상의 정통성과 하잘 것 없는 헤게모니를 쟁취하는데 키워드라도 되는 양 집단적 광기로까지 발전하고 있으므로, 계몽적인 차원에서라도 개념의 연원과 배경을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성이 생겨났다.

여기서 나는 그 반론이 얼마나 무실체하고 비논리적인가를 밝혀보려고 한다. 나아가서 이 계몽적 해설이 반론자가 의존한, 문제의 개념에 대한 일부 한국학자들의 몰이해와 잘못된 지식을 수정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몰이해와 오독에서 연원하여 ‘사회진화론’이 광범위하게 사회적 상식으로 고착되어있는 놀라운 현상이 분석과정에서 들어났다.

왜 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라고 말하는가? 간단히 정의해보자면, 사회진화론자는 ‘인류가 (또는 온 생명이) (개인보다는) 사회(또는 공동체, 전체)를 단위로 하여 진화(진보, 변화)해 야 한다’는 주장을 편 사람을 일컫는다. ‘논’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함석헌을 걸출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지만 함석헌이 체계적으로 정립한 이론은 드물다. 그가 담론, 강설, 저술, 선언, 그리고 행동에서 우리가 그렇다고 해석할 뿐이다. 누구라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처럼 체계적인 이론을 내놓지 않았더라도 ' ...주의자'나 '...론자'라고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외에도 비폭력주의자, 사회혁명론자, 종교개혁론자, 평화주의자, 세계주의자, 민중주의자, 다원주의자, 무교회주의자, 전체주의(론)자, 등등 갖가지 명칭을 부칠 수 있는 다면적인 사상가였다. 국가주의를 인류의 낡은 유물로 반대하는 그를 두고 심지어 무정부주의자라 한들 그 해석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논박하거나 그 때문에 함석헌을 말하거나 연구할 자격이 없다고 몰아세울 수는 없을 터이다. 이러한 작태는 학문에 대한 비학문의 정치적 간섭에 해당한다.

우리가 함석헌에게 적용하는 ‘사회진화론’ 자체는 큰 틀의 우산 개념, 일반론, 총론이다. 그 각론적인 전개에서는 가치론적으로 여러 가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형태들이 등장했다. 그 한 가지 형태를 들고 전체 이론 자체를 부정, 반대하는 것은 학술적 상식을 벗어나는 짓이다. '사회가 진화한다'는 현상론이나 '사회는 진화해야 한다'는 이상론이거나, 그 주장자체에 어떤 오류가 있다는 것인가. 다만 구체적 방법론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고 이념이나 입장에 따라서 수용하기 힘든 실천방법이 제시될 수 있다. 한 가지 시각에서 오독, 오용된 역사적 사례를 들고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가령, 비슷한 예로 사회발전론이나 사회개혁론이 제안된다면, 사회퇴보론이나 사회 정체(停滯)론이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면, 발전론이나 개혁론자체가 부정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발전과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진화론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인가.

사회진화론은 한 가지 형태만을 갖는 고정불변한 이론이 아니다. 총론적 우산 개념으로 여러 가지 형태가 등장해왔다. 허버트 스펜서의 개념도 그 한 가지 초기 형태에 해당한다. 비판대상이 된 진화론은 독일이나 일본에서 정치적으로 오용된 특정한 형태로서 그 한 변형일 뿐이다. 많은 유비(類比)를 들 수 있다. 한 가지로 공산주의를 들면,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에 기초하여 정형화, 거의 절대화한 공산주의(Communism)만 있는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발전된 한 가지 특정 형태일 뿐이고, 스펜서도 언급한, 원론적 공산주의(communism)가 있다. 정형화한 공산주의에도 소련식, 중공식, 북한식, 쿠바식 등 지역에 따라, 나라마다 그 형태가 다르다. 자주 공산주의와 동일시되는 사회주의도, 일찍이 슘페터가 언급했듯이, 나라마다 그 형태가 다르다. 자본주의도 그러하다.

더 분명한 유비를 들어보자. 한 가지는 동양평화론이다. 일본제국의 앞잡이 이등방문이 동아평화론을 제기했다고 해서 안중근이 사형수로서 기초한 동양평화론을 잘못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또 하나의 예는 민족개조론이다. 친일로 전향한 이광수가 일찍이(1920년대) 제기한 민족개조론 때문에 아무도 다시 제기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은 바로 함석헌도 제기한 주장이다.(전집2:70-81,96) 오죽했으면 함석헌도 민족과 민족성을 개조해야한다고 했을까. 동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전개되고 있지 않는가.

함석헌 사상의 요지를 말하면서 특수한 방법론보다 원론적인 일반 사회진화의 개념을 의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그 오랜 개념발전사에서 한때 정치적으로 오용된 일부 사례만을, 더구나 우리의 압제자였던 일본인의 해석을 전형으로 삼다니, 공격을 위한 공격, 아니면 무지의 소치라 할 밖에 없다. 오독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사회진화론의 변종이나 한 가지 형태가 정치적으로 잘못 이용된 사례가 있다고 해서 그자체가 애초부터 잘못 성립된 것이고 마치 폐기처분해야할 개념이나 사상처럼 말하는 것은 배타주의적, 교조적 사고방식에 속한다. 다원주의적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아주 중요한 것은 비판자가 반증으로 드는 일본제국주의자의 사회진화론은 실제로는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일부 한국학자들은 이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다.

모든 사상은 선택적으로 수용하기 마련이다. 함석헌의 사상과 신앙, 특히 예를 들면, 그의 기독교관, 신관은 독특하다. 가톨릭 전통과도 다르고 개신교의 교파신학과과도 거리가 있다. 여기서도 사상의 선택적 수용이 드러난다. 함석헌의 사회진화에 대한 입장도 선택적이며 독특하다.(저작집 17:28, 106)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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