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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1984”는 이미 현실이 되었다!-존 그레이와 함석헌의 비판철학에 기대어

by anarchopists 2021. 1. 19.

“1984”는 이미 현실이 되었다!-존 그레이와 함석헌의 비판철학에 기대어

 

“참과 거짓 사이에 결정불가능성의 범주가 있다.”_A. Jacquard

 

코로나 이전과 이후, 민중의 근본적인 정신 바탈이 달라진 게 없다!

 

바이러스로 불편한 것도 불편한 것이지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인간은 서로가 의심의 대상과 익명의 환자로 보면서 마구 신고를 해도 되는 사물적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우리의 지나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발동이 북유럽이나 미국이라는 나라들과 비교하면서 괜한 우월감을 갖는 집단적 소속의 동질화를 문제라고 보았다. 미국의 의료보험제도를 들먹이는 것까지는 좋으나, 마치 그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것이 굉장한 미스테리인 양 비아냥거리거나, 스웨덴 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국가가 ‘집단면역’ 체제를 가동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인식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주관적 비교에 불과하다.

미국의 경우 마스크를 쓸 의무를 말한다면, 반면에 쓰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한 번쯤 눈여겨봐야 하고, 유럽의 국가들은 나라가 획일적인 강제행정명령을 내리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체주의의 실상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경험을 했다. 이를 대변하듯 철학자 알베르 자카르(A. Jacquard)는 “공동체의 목적이 질서와 안녕이라면(...) 질서에 대한 욕구와 안녕에 대한 강박관념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전체주의적이며 닫힌 죽음의 사회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A. Jacquard, 장석훈 옮김, 과학의 즐거움, 궁리, 2002, 63)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스크 착용이나 방역의 자유는 개별적인 시민의 의지에 따른 것이지 그것을 국가체제가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 자체에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폐단이 인종차별주의(실상 코로나로 인해서 일부 나라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하게 발생하지 않았는가?), 대량학살 등으로 이어졌던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방역체계는 우리에 비해 허술하기 짝이 없다고 비하할지 모른다.

허나 반대로 우리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우리나라는 박정희와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이승만 때부터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의 트라우마를 앓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 이념적인 전쟁을 지나 그리고 분단국가에 살면서 한 사람의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줄 수 있으며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가를 체험(Erleben)했다. 그것을 극복하고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은 늘 처절(悽絶)했다. 우리는 부단하게 민중에 의한 민주화를 위해서 싸워왔고 여전히 그 과정 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적인 트라우마가 지닌 이중성, 곧 수용과 거부에서 우리는 수용에 매우 익숙한 시민이 되었던 것 같다.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하는 행정명령, 종교단체에 확진자가 생겼으니 집회를 중단하라는 지시와 관리, 감독, 그리고 간섭 등에 적절하게 따라주는 것이 성숙한 시민사회의 척도인 양 호도했다(함석헌이 말한 것처럼, ‘낡은 종교는 버려야 하는’ 게 옳다. 묵은 전통을 자랑하는 종교, 생존경쟁적 종교는 정신적으로 낡은 질서에 대한 혁명이 필요한 것은 백번 지당하다. 그것은 논외로 하자. 함석헌, 인간혁명, 제일출판사, 1979, 140 참조).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시민사회의 성숙이 가져온 성공적인(?) 방역이 과거의 전체주의나 국가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적 발상에 잘 부합한 결과라고 본다.

종교학자 최준식은 우리나라 가부장제의 극단에 바로 과거 ‘조국’(祖國) 근대화의 기수이자 ‘아버지’로 간주되었던 박정희를 꼽는다. “한국 사람들은 어떤 우두머리가 이끌고 있는 일정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는 양순하고 공중 도덕도 잘 지킨다. 그러나 강한 지도자가 없거나 그 집단을 떠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좀 과장해 이야기하면 ‘개판’이 된다”(최준식,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사계절, 1997, 95-96). 확진자를 색출하기 위해서 온갖 신상을 다 털어내다 못해 아예 실명과 주소까지 확인·유출이 되어버리면서 그 한 사람이 모욕과 수치를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은 과거 조지 오웰(G. Orwell)이 염려했던 『1984』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 위험하고 심각하지 않는가? 익숙해진 너무나 익숙해진 통제된 일상을 살아온 민중들의 습성이 고착화된 것이라고 보면 너무 거친 표현일까? 아니면 영국의 사회심리학자 마이클 빌리그(M. Billig)가 자문하는 것처럼, “공동체, 국민성, 언어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자연스러움의 느낌 자체가 문제인가?”(M. Billig, 유충현 옮김, 일상적 국민주의, 그린비, 2020, 36)

 

개인과 전체의 구원은 없다!

 

“조밀하고 폐쇄적인 공동체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된다. 현대의 개인주의는 이렇게 비공식적인 감시가 늘상 존재하는 공동체가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한다고 비판한다. (...) 이웃의 “보는 눈” 대신 감시 카메라가 들어섰다. 게다가 이제는 인구 전체에 대한 정보가 웹에 올라온다. 도처에 편재한 감시 기술은, 개인의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과정에서 응집성 있던 옛 공동체가 쇠퇴한 결과다. (...) 누구나 15분간의 명성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도 15분간의 익명성은 가질 수 없는 꿈이 되었다”(John Gray, 김승진 옮김, 꼭두각시의 영혼, 도서출판 이후, 2016, 136-137).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John Gray)의 분석과 예견은 현재의 우리 개별 인간이 암암리에 얼마나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감시당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짚어준다. 스마트폰, 은행카드, 대중교통수단사용내역, CCTV 등을 통한 신속한 색출과 격리, 대처를 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나를 보는 눈이 매우 많아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코로나 이후에 인공지능의 투입도 빨라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만큼 인간은 국가체제나 자본주의체제의 적이라고 간주되는 이들을 데이터화하고 대체할 수 있는 시기가 빨라진 것이다. “점차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생각하는 기계에 의해 내몰리게 될 것이다. 인간 지식의 진보가 가져온 최종 결과는 인간이 불필요해지는 상황일 것이다”(John Gray, 위의 책, 121). 절망적인 이야기로 들리는 이 사실은 불을 보듯 빤한 현실이 될 것이다. 물론 기술유토피아니스트들은 오히려 인간을 최대한 배려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것이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대 세계는 기독교적 개념을 이어받았다. 기독교는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구원이 펼쳐지리라고 본다. (...) 기독교 이래로 인간의 구원은 (적어도 서구에서는) 역사상의 움직임으로 이해됐다. 역사를 인간 해방의 과정(혁명을 통해서건 점진적 개선을 통해서건)이라고 본 모든 현대철학은 기독교적 서사의 모호한 변종인 셈이다. 그리고 기독교적 서사 자체도 예수가 원래 전했던 메시지의 모호한 변종이다”(John Gray, 위의 책, 72-73).

실제로 예수가 생각한 해방은 도래하지 않은 미완성이다. 역사가 전개될수록 상대적으로 기술의 진보와 자본의 격차, 그리고 인간의 구속은 더 심화되고 있다. 인간의 해방은 항상 당대의 구속으로부터 자유와 저항이었다. 그런데 몸부림칠수록 점점 옥죄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술제국주의자들이나 기술신봉자들, 그리고 기술열혈론자들이 그리는 세계가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구원이 궁극적으로 자유와 해방이라고는 하나, 그 자유와 해방 역시 기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에집트로부터의 해방은 다시 인간의 판단을 가로막는 불가항력적인 홍해바다로 인해서 영원히 요원하게 될 것이다. “자금을 배분하는 은행업뿐 아니라 의료 진단이나 경영 기능들도 자동화됐다. 전문직이라고 불리는 많은 직업이 통째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자리를 없애고 있는 것은 단지 컴퓨터의 정보 처리 능력만이 아니다. 컴퓨터의 패턴 인식 능력까지 발달하면서, 이제 기계는 인간의 판단까지 대체하고 있다. (...) 오늘날 몰려오는 기술 진보의 파도는 인간 대다수를 생산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만드는 경향을 내재한 것으로 보인다. 기술 열혈론자들이 그리는 더 먼 미래에는 인간이 더 완벽하게 필요없어질 것이다”(John Gray, 위의 책, 123-125). 여성해방운동가 헤디 위스(Hedi Wyss)가 말한 인간의 진정한 해방(Emanzipation)이란 이런 것이다. “각자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여 복종이 아닌 이해와 사랑을 토대로 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을 뜻한다”(Hedi Wyss, 장지연 옮김, 새내기 여성학, 여성사, 1994, 218, 224). 이 해방의 의미를 기술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으로 전유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시대의 기술비평적/기술저항적 야인(野人)이 요청된다!

 

“인간처럼 오류가 있고 무지한 생명체만이 인간이 자유로운 방식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는 물질이 어떻게 해서 우리의 세계를 꿈꿀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꿈이 끝나서 우리가 죽고 나면 그 다음에 무엇이 올지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게 만들어 줄 지식을 열망한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도 말이다. (...) 비틀거리지 않는 꼭두각시가 되는 대신 인간세계에 발부리를 부딪혀 가면서 길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위버-마리오네트(진화의 결과로 자기인식을 갖게 된 꼭두각시 같은 존재)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꼭 날 수 있게 될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하늘로 비상하기를 추구하지 않으면 땅으로 떨어지는 데서도 자유를 찾을 수 있다”(John Gray, 위의 책, 185-187).

독자들 중에는 기술에 대해서 너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부정적(negative)이라기보다 비판적(critical)이라고 말해야 옳다. 시비를 분명히 가르는(krinein) 말대로 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 기술이 우리를 편리(便利)하게 해 준 것도 있지만, 배설물[便]과 예리한 칼[利]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술을 대하면 좋은 것도 있지만 ‘찝찝한 것’, ‘구린 것’, ‘석연찮은 것’도 있고, 잘못 사용하면 상처를 입히기도 죽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에 함석헌은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들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해독을 가장 심히 받고 있는 나라다. 그 원인은 우리가 급작히 남의 문명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본래 문명은 제가 스스로 낳아야 하는 것이다. 문명은 정신이 아니고 지식이요 기술이기 때문에 남의 것을 받으면 반드시 해가 된다. (...) 기술 지식이란 정신이 능히 그것을 자유로 쓰리만큼 발달한 후에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어린이에게 기계를 주면 상할 것은 정한 일 아닌가? 정신이 서기 전에 기술 문명이 먼저 들어오면 그 사회의 자치적인 통일을 깨뜨린다. 그러기 때문에 망한다. 간디가 물레질을 주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함석헌, 앞의 책, 177).

여기서 정신이 먼저라는 말은 누누이 강조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의 자유와 의지에 따라서 기술을 사용하고 기계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기술은 개인이나 사회의 자치, 자주, 자생의 구조를 위험에 빠뜨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생존을 위해서 기술과 기계를 사용하도록 하는 새로운 구조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치, 자주, 자생이 사라지면서 구조나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이 되고 만다.

이번에 발생하는 코로나 사태는 두 가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하나는 집단적 순응의 미학이라는 장치가 배제와 격리,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졌다는 정치경제적 사건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전자와의 연관성에 비추어 본격적인 기술과 기계의 파놉티콘은 물론 그 보편적인 생활의 실험적 사태였다는 점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생태계의 조화와 상존을 위한 질서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는 환경철학적 자성은 거의 보기가 어렵다. 득보다 실이 더 많을 미래의 삶을 청사진으로만 내다볼 수 없는 현실이다.

함석헌은 역사는 돼감[歷史]이라고 풀었다(함석헌, 위의 책, 168). 이 사태 역시 우리가 궁극적으로 완성된 존재(Be)가 되기 위한 역사적 과정(coming)이라고 한다면 좋으련만 낙관적인 역사를 제시하기에는 인간의 욕망이 너무 많다.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능을 탓할 수는 없다. 코로나를 경험하면서 저마다 상호 피해가 아니라 죽고 싶지 않은 본능이 어떤 독단적 체제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던 것은 아니었을까?

“불멸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열렬히 바라는 희망이다. 불멸이 저편 세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의미하든, 시간에서 벗어나 영원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디어도어 포이스는 필멸을 소중이 여겼다. 죽음은 지고의 악이기는커녕 삶의 부담을 덜어 주는 좋은 것이었다. 포이스는 영원히 사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으며, 신조차도 죽음으로 망각되기를 열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John Gray, 앞의 책, 81). 혹 우리가 이런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자기는 미쳤다는 소리를 듣다 죽더라도 휩쓰는 이 물결을 막으려 홀몸으로 나서는 야인, 들사람이 있어야 한다”(함석헌, 앞의 책, 178). 미쳐 가는 세상에 제동을 걸어 줄 그 야인 같은 씨ᄋᆞᆯ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도 미친 짓일까.

 

절대자유, 녹산(鹿山), 형암(炯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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