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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영성

[김조년 제2강] 함석헌이 말하는 고난의 의미

by anarchopists 2020. 1. 3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3/20 09:27]에 발행한 글입니다.


시대의 낌새와 소리
함석헌이 말하는 고난의 의미

함석헌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고난’으로 본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역사인들 고난 없이 오늘에 이른 것이 있으랴마는 특히 우리의 역사를 그렇게 본다. 지리상으로, 문화상으로 볼 때도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종교가 번갈아 역사를 흘러오면서 달라진 것도 그 한 가지를 뜻한다고 본다. 한 가지 종교로서는 변화되는 역사를 이끌거나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난’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하여 곰곰이 따지고 생각한 끝에 결론으로 얻은 것이 ‘고난의 의미’였다. 도대체 끝 모르게 지속되는 고난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가 그가 풀어야 할 과제였다. 그것은 바로 고난을 통한 구원, 개인의 구원, 민족의 구원, 세계역사의 구원, 전체 인류의 구원이다. 나아가서 생명의 구원에 이르기 위한 ‘고난’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역사(시간)를 인격으로 볼 때만 가능하다.

일본의 식민통치시대에 찾은 고난의 역사관은 “밖에서 오는 엎누름, 안에서 오는 슬픔”에서 복받쳐 오르는 울음이었다. “외로운 종의 앓는 소리”다. “본래 이것은 나 홀로의 한숨이며 돌아봄이요, 알아주는 친구에게 하는 위로요 권면이다. 우리의 기도요 믿음”이다. 그래서 역사사실 속에 들어 있는 “뜻을 풀어 밝혀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볼 때 “부끄러움과 사랑과 곧음”의 자리에서 “믿자는 의지와 나라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이려는 양심”을 가지고 서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사관은 매우 깊은 한계를 가진다. 고난을 겪는 자신을 납득시키기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도 쉽지가 않다. 그것은 고난이 내 몸에, 내 나라에, 내 사회에 가득할 때 그 고난 뒤에 올 어떤 영광을 말한다고 할 때, 너무 힘든 현실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 또 고난이 지나간 뒤, 아니 고난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어느 정도 태평스러운 시대에 이 고난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 즉 고난이란 것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때 그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러나 또 하나 어려운 문제는 하나의 고난이 지난 뒤에 해방되고 구원에 이르렀는가 하면 또 다시 다른 고난의 물결과 파도가 몰려올 때 그 겪은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식민지지배공간의 고난과 해방공간의 고난이해와 평화로운 시기의 고난이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고(苦)는 생명의 원리다. 고를 통해 자유에 이른다”
는 믿음만으로 이해하고 설득하기는 쉽지가 않다. 해방공간의 좌우익의 갈등과 남북전쟁의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고난의 역사라도 해방 전과 해방 후가 그 의미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전에는 주로 외적의 쳐들어옴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안에서 일어난 민족 분열 때문이다. 전엣 것을 외적 고난이라면 이것은 내적 고난이다. 물론 전에도 근본 원인은 주체성의 부족에 돌려야 할 것이므로 그 의미에서는 내적인 것이 있고, 지금도 현실적으로는 국제 관계를 타고 오는 것이므로 그 의미에서 외적인 것이라 할 것이나, 시대적으로 파악하려 하면 역시 구별해야 할 것이다.”(뜻: 17) 결국 국가주의를 극복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는 점이다.

물질이 풍요롭고 사회가 평화로우며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다고 할 때 고난의 의미는 없는 것인가? 물질생활의 수준치가 전 인류의 역사 상 가장 높다는 지금, 우리가 생각할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명의 고통, 고난, 죽음의 외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오늘날 고난의 의미를 새로 생각하는 화두가 될 것이다.

사회나 상황을 현실로 보고 뜻으로 읽을 때 그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특히 고도로 산업이 발전하면서, 물질이 풍요로워 점점 더 물질지상주의에 빠지는 지금, 그로 인하여 찾아오는 재정위기를 ‘고난’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정치, 군사, 식민지배의 고난은 피부로 느끼지만, 재정위기 상황에서 오는 고난을 메시아를 기다리고 구원을 맞을 고난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남북한의 전쟁을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메시지로 읽은 함석헌이라면, 오늘의 재정위기, 환경위기로 대표되는 문명의 종합위기는 생명경시와 물질지상주의를 기초로 하는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라는 메시지로 읽지 않을까?

함석헌은 고난이 계속하여 반복되는 것은 “서민, 곧 백성이란 것이, 이 씨알이 힘 있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 아닌가?”고 되묻는다.(14: 111) 힘이 없다는 말은 자아분열 증상을 말한다. “고난은 결국 언제나 자아분열의 문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데 고통이 있다. 그러므로 극복은 결국 심기의 일전에 있다.”(뜻: 18) 이것이 힘이다. 힘이 있다는 말은 제 뜻을 알고, 제 선 자리를 이해하며, 제 할 일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할 것이다.

이것은 절대긍정의 믿음에서만 가능하다. 누구에게 위임하고 손 개 얹고 앉아서 밥먹여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제 손, 제 발, 제 머리를 움직이고 맘을 다해 제 주체로 살아나가는 씨이 설 때 고난의 극복은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상당해 본다. ‘고난사관’은 그의 믿음이요, 민족과 인류의 희망이요 해방관을 집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조년 선생님은
■ 김조년 선생님은 현재 한남대학교 사화복지학과(사회학) 교수로 계신다. 함석헌 선생님과 많은 교류를 하시고 함 선생님이 서거하신 뒤에는 “함석헌기념사업회” 감사,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등을 맡고 계신다. 그리고 한남대학교에서 '함석헌과 한국사회'란 제목으로 사이버강의를 개설하고 있으며. 격월간 “표주박통신” 주필을 맡고 계신다.
■ 그 외 자본주의 대안운동으로 “대전민들레의료생활협동조합” 이사장, “대전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전 공동의장)을 맡고 계신다.
■ 저서로는 “사랑하는 벗에게”, “성찰의 창문으로 바라본 세상”, “평상의 편지”, 카토 본트여스 판 베에크, “그래도 내 마음은 티베트에 사네”(번역본) 등 다수가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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