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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김영호-제6강] 함석헌의 민족주의, 세계주의

by anarchopists 2020. 2.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19 09:18]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서거20주기 추모학술모임-원고]

함석헌과 간디의
민족주의, 세계주의, 전체주의

간디와 함석헌의 민족주의는 보편적 민족주의다.
간디와 함석헌은 평생 자기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헌신한 애국자였다. 둘 다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다. (함석헌은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묻혀있다.) 진리와 하나님을 찾고 받드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은 이들에게 왜 또 나라인가. 나라가 곧 진리와 하나님을 찾는 통로요 삶의 현장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진리와 신의 속성인 사랑과 자비의 실현 대상인 가장 가까운 이웃들의 집합체,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무엇보다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간디는 명시적으로, 함석헌은 함축적으로 민족주의자임을 들어냈다.

동시에 이들에게 민족과 나라는 궁극적 목표라기보다는 인류와 진리의 경지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요 디딤돌이었다. 간디는 “나는 인도의 겸손한 신하이며, 인도를 섬기려 하는 과정에서 나는 인류전체를 섬긴다”고 하였고, 함석헌은 정리했다: “나라는 나의 진리 위한 싸움에 있어서 내가 붙어있는 부대 이름이다. 그 부대가 곧 내 목숨을 바치는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그 부대에 충성치 않고 그 싸움을 할 수는 없다.”(전집4:392)

간디는 보편적인 원리를 탐구하고 실험하면서 세계적인 인물로 존경받는 인물로 부상되었지만 현실적으로 일생을 인도와 인도국민을 위해서 투쟁하고 헌신했다. 그는 일생 동안 세 가지 운동을 전개한 셈이었다. 세 가지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 공동체를 위하여 체재하는 동안 벌인 인종 차별 철폐, 인도의 독립, 인도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막는 일이었다. 모두 인도와 관련이 있다. 그에게 인도는 현실의 전부였던 것이다. 세 가지 실천운동의 도구는 진리파지(satyagraha) 운동으로 대표된다. 간디 스스로 민족주의자임을 당당히 밝혔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배타적 민족주의자가 아님을 표명했다.

“나의 애국심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를 포용하는 것이며 나는 다른 국민들의 간난과 착취를 등에 업고자 추구하는 애국심을 절대 배격한다. 나의 애국심은 항상 인류전체의 최대의 선과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위하여 자유를 원하지만 다른 나라들의 착취를 대가로 하거나 지위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만약 그것이 영국의 멸망이나 영국인의 멸종을 의미한다면 인도의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인도의 자유를 위하여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기를 마다하니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절대 진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도의 자유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그 속에서 태어나고 그 문화를 전수받은 내가 그 나라를 섬기는 데 가장 적격자이고 그 나라는 나의 봉사를 받을 우선권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애국은 배타적이 아니다. 다른 국민에게 상처를 주고자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이로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1990:108-109)

간디의 민족주의는 국제주의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전제조건이다.

“우리가 민족주의자(nationalist)가 되지 않고는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국제주의는 민족주의가 사실이 될 때에만 가능하다. 악한 것은 민족주의 자체가 아니다. 악한 것은 근대국가들의 해악이 된 속 좁음, 이기주의, 배타성이다. 각기 다른 나라를 희생하여 이익을 얻고 그 폐허 위에 올라서기를 바란다.”(108)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간디가 말하는 ‘국제주의’는 오늘날 이야기하는 ‘세계화’(globalism)와는 차원이 다른, 그 이전 단계에 해당한다. 그가 말하는 국제주의는 국가들이 정치, 경제적 독립성과 문화의 독특성을 보존하면서 공존과 평화를 유지하는 국제질서를 선호하는 형태이지 자유무역이 대표하는 (경제, 정치, 문화의) 통합적인 세계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기계화, 산업화로 인한 일자리의 축소보다는 물레가 상징하는 수공업 산업이 차라리 일자리의 고른 보장을 담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규모 산업화는 경쟁과 마케팅 문제가 대두되면서 반드시 마을주민들의 직간접적 착취로 이끌 것이다.”(1990:117) 간디의 예측이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았는가. ‘세계통상’(world commerce)이란 것도 약소민족을 착취하기 위한 미사여구로 간주했다.(111) 그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간디의 경제관은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저술의 바탕이 되었다. 함석헌도 한편으로는 세계주의를 내다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도가철학에서(도덕경 81장) 말하는 소단위 생산과 생활 방식을 동경했다.

함석헌의 민족관은 어떤가. 그가 ‘버리지 못할 것’ 세 가지(민족, 신앙, 과학) 중 첫째 것이 민족이다. “민족 없이는 나 없으니 나는 민족적 전통을 지킬 의무가 있다.”(전집4:227) 간디와 상통하는 입장이다. “예수조차 유태민족의 사람”이듯이, “민족적 배경 없이는 인격이 없다.”(1:68) “하나님은 그 뜻의 한 줄씩을 각 민족의 요람 위에다 쓰셨다.”(마찌니 인용)(69)

그러나 그는 민족을 사랑하고 인정하지만, 간디와 달리 민족주의자는 아니라고 일면 선언한다. 민족과 민족주의를 구분한다. 그러나 진리가 민족을 우선한다는 간디의 소견에 동의한다. “민족을 주장한 것은 좋지만 그것을 우상화해서는 안돼요. 제 민족 옳게 하려면, 간디의 말처럼 진리에 배치될 경우엔 민족까지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고 봐요.”(전집4:354) (김영호, 내일 계속됩니다.)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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