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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김영호 제5강] 신은 무신론자까지 아루르는 존재다

by anarchopists 2020. 2.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18 09:15]에 발행한 글입니다.

[김영호의 함서헌은 말한다-5]

간디와 함석헌의 유산

종교는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간디와 함석헌의 종교와 신앙은 전통적인 틀을 벗어난 것이다. 간디의 배경인 인도의 경우, 힌두교 성서인 베다경전은 기원전 1500년 경 인도대륙에 침입한 아리안 족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코드 문서였다. 베다에 들어있는 카스트제도의 근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간디는 경전에서 비인간적인 요구나 의례, 숭배, 순례는 거부했다.(1990:59) 이성과 도덕성에 거역하는 해석이나 주장은 부정했다.(1990:56)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였다. 카스트 제도도 그 하나이다. 그는 내생에 태어나고 싶지 않지만 만약 태어나야 한다면 네 카스트 계층에도 속하지 못한 ‘불가촉민’(the untouchable) 즉 ‘접촉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간디가 불가촉민에 대한 인식과 불평등을 바꾸기 위해서 큰 노력을 기울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법적으로 차별이 금지되었다. 인도사회에 미친 조직종교의 폐해에 대하여 간디의 숭배자요 제자격인 네루 초대 수상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는 다른 어떤 것 이상으로 종교적인 나라이다. 인도와 다른 곳에서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 또는 어떻든지 조직화한 종교의 모습은 나를 공포로 몰아넣어왔으며, 나는 자주 그런 종교를 비난하고 청소해버리고 싶었다. 거의 항상 그런 종교는 맹신과 반작용, 교조(도그마)와 위선, 미신과 착취, 그리고 기득권의 보존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네루는 그래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수천 년간 종교의 사슬에 매인 인도인으로서 대단한 용기를 보여준 것이다. 간디가 숭배하는 하나님은 전통적인 힌두교의 신관을 벗어난다. 그의 신은 절대적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며 사랑이다. 나아가 무신론자의 무신론까지 아우르는 존재이다.

함석헌의 하나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관이나 민족 고유의 신관을 각기 벗어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모두를 아우르는 포괄적 신관이랄 수 있다. 간디처럼 그도 유신론, 무신론을 다 아우르는 종교를 탐색했다.(전집1:19) 두 인물의 신관은 인격적이면서 비인격적인 양면성과 도덕적인 측면까지 내포할 만큼 포괄적이다. 간디가 “진리가 곧 신‘임을 강조하긴 했지만, 간디가 암살당해 죽는 순간 부른 대상은 인격적 신(Rama) 즉 (비슈누) 신의 화신이었다. 함석헌의 하나님은 기독교의 신만은 아니다.

“우리말의 ‘한’(혹은 칸, 큰)은 일이면서 대(大)를 표시하는 말이다. 그런데 한자로도 일(一)이면서 대(大)면 ‘천’(天)이 되는 것 같이, ‘한’은 곧 하나님이다. 어쨌건 하나님, 곧 한님은 ‘절대 하나’면서 ‘절대 큰’이라는 사상만은 틀림없는 것이다. 환인(桓因), 환웅(桓雄) 하는 것은 이 한님을 가리킨 것이다.”(전집2:348)

간디와 함석헌은 공통적으로 다원주의적 종교관을 뚜렷하게 제시하였다.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 된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들이다. 간디는 한 나무의 가지가 여럿이듯이 근본적인 종교는 하나이지만 개별 종교들은 많다고 말한다.(1960:58) 또한 “종교들은 동일한 지점에서 합류하는 다른 길들”이라고 비유한다.(54) 간디는 종교가 다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관찰한다.

“하나의 신(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모든 종교들의 초석이다. 이론상으로는 하나의 신이 존재하는 이상 오직 하나의 신만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실천 상으로는 나는 신에 대한 동일한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아마도 항상 다른 기질과 기후 조건에 응답하는 다른 종교들이 있을 것이다.”(1990:55-6)

간다와 함석헌은 다원주의 종교관을 가졌다.
간디와 비슷하게 함석헌은 진리의 산에 오르는 길이 하나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종교’란 것은 상대계(相對界)의 일이지 절대가 아닙니다. 기독교조차도 여러 종교 중의 한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라는 사람은 상대적인 좁은 소견에 사로잡힌 생각입니다. 그것이 곧 교파심입니다.”(전집9:314) “사상적으로 하면 모든 종교는 구경에 있어 하나다.”(전집1:395)

함석헌은 새 종교를 꿈꾼다. 새 종교의 출현이 필요한 것은 “오늘의 기성종교들은 다 국가주의와 붙어먹고 있기 때문이다.”(전집12:129) 국가주의는 국가가 무소불위로 개인을 통제하고 전쟁과 분쟁을 일으키는 제도로 인류가 넘어서야할 단계에 속한다. 아직도 국가를 통치하는 절대 권력을 거머쥔 대통령이 종교를 업고 분열적 종교편향을 보여주는 오늘의 현실은 함석헌의 통찰이 타당함을 증명한다.

간디의 관점에서 보자면 함석헌의 새 종교는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존재하는 종교들처럼 큰 울타리를 쳐주는 새로운 통합적 체계들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있다. 함석헌은 새 종교가 “인위적으로 이 종교 저 종교를 뜯어고쳐 만드는 ‘인조종교’ 같은 것은 아님을 밝힌다.(전집12:394). 새 종교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되어 나오는 것,’ ‘주어지는 것’이다.(130) 통합이나 통일을 표방하는 종교들은 인위적인 것들이다.

이 같은 20세기 두 지성의 종교이해에 비추어 볼 때, 21세기 종교와 우리사회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제도화한 종교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공적과 영향을 따져볼 때 선기능이 우세할까 역기능이 우세할까. 인류가 종교의 이름으로 겪은 고통과 전쟁, 갈등을 총합할 때 조직종교를 통한 신앙이 타당하고 올바른 것인가. 함석헌은 일찍이 무교회주의에 심취했다. 당시 기독교는 그에게 필연적(또는 우연적)으로 주어진 유일의 종교다운 종교였다. 전통적인 유교와 불교는 종교의 구실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렇게 볼 때 당시의 무교회주의는 오늘날 무(조직)종교주의로 확대할 수 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종교를 ‘홀로’(in solitude) 탐색하는 행위로 정의한 대로 함석헌과 간디는 조직종교에 의존하지 않고 신과 홀로 맞서면서 종교에 덧 씌워진 껍데기와 허식들을 과감히 벗어던져버리고 그 알짬을 붙잡았다. 함석헌은 말한다. “종교야말로 가장 구체적, 개인적인 사실이다. 그 말은 나와 하나님과의 직접 교섭이란 말이다.”(전집1:42)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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