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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김영호 제4강- 함석헌의 종교관]

by anarchopists 2020. 2.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17 09:00]에 발행한 글입니다.

[김영호의 함석헌을 말한다-4]


함석헌의  종교관

종교는 개인신앙이 아니라 삶의 원리다.
간디와 함석헌은 공통적으로 유별나게 종교를 인간의 궁극적 가치로 내세웠다. “나는 단 1초도 종교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다.” (간디 1960:62) 하지만 그것은 조직화한 제도종교는 아니었다. 조직종교가 가져다주는 방편적, 심리적, 사회적 기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참 종교의 모습은 감추어져있다. 두 스승이 마치 인류는 사랑하지만 인종의 구분과 차별은 사랑하지 않았듯이, 즉 유(類)개념으로서 인간은 사랑하지만 하위개념 즉 종(種) 개념으로서 인간의 분류를 싫어했듯이, 종교에 있어서도 하위개념으로서 조직종교나 종파를 본질적인 종교로 보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종교는 형식적인 종교나 관습적인 종교가 아니고, 모든 종교들의 밑바탕에 있는 것, 우리를 만든 이(Maker)와 직면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1990:51) “이 종교는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등을 초월한다”(1990:54)
그런 맥락에서 진리가 하나인 것처럼 종교는 하나이다. 이 이해는 간디와(1990:58) 함석헌이 일치하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종교를 개인 신앙으로서 삼아 신이나 하나님을 진리처럼 삶의 지도원리로 받들었다. 나아가서 신을 다른 데서가 아닌 자기 내면에서 찾는 데 동의한다.(1990:51, 59)

여기서 간디의 종교관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함석헌의 종교관과 유사성이 클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누구보다 종교적으로 계명한 두 주인공이 다 다(多)종교 전통과 사회를 배경으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디는 힌두교, 특히 모친이 가졌던 비슈누 신앙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종교는 한 뿌리만이 아니고 여러 종교에서 선택한 교리나 사상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절충주의적(eclectic)인 내용이었다.

위에서 개별종교를 ‘초월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실로 ‘창조적인 종합’이랄 수도 있다.(1997:36) 여기서 나온 대표적 산물이 비폭력주의였다. 그것은 그가 개별 종교의 신앙 대상인 신이나 다른 개념보다 ‘진리’에 대한 탐구 정신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 입장은 또한 종교간 대화의 정신을 함양하고 종교간 가교를 놓아주는 입장이다. 그가 희생자가 되었던 것도 힌두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관철하려는 의지에서 파키스타의 분리를 막으려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간디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도의 우산에서 분리해나간 파키스탄은 결과적으로 더욱 분열되고(방글라데시) 인도보다 더 낙후되고 이슬람 아랍 권속에 휘말려 큰 고통을 겪게 된 셈이다.
간디의 분석으로는 엄격하게 말해서 크리스천이니 힌두니 모슬렘이니 하는 구분은 없어야 한다. ‘전일적이고 조각조각 나누어지지 않은 인간존재들’이 여러 종교 전통들의 자원을 맘대로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크리스천, 모슬렘, 불교도의 구분은 이 종교전통들의 태생지와 영적인 고향임을 나타내고 이들을 가장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진지한 영적 진리 탐구자는 모든 가치 있는 통찰을 받아들이면서 절대 진리를 향한 여행을 계속한다.

간디에게는 ‘신에게 열려있음’은 ‘모든 종교전통에 열려있는 것’이었다.”(1997:37) 간디는 신의 무한성을 한 단일 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두려고 하고 다른 종교들을 라이발이나 적으로 보는 근본주의자들은 도덕적 근시안, 영적인 교만, 심지어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다고 보았다. 간디자신에 대한 사후의 평가는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전범이 된다. 함석헌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장 참되게 실천한 사람은 그이(간디)라는 생각뿐이다”(전집4:197)라고 표현했다. 간디를 수십 년 동안 가까이서 관찰했던 스탠리 존스 목사는 간디의 죽음을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간 이래 최대 비극”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다원주의종교로 갈 때다.
종교에 대한 간디의 체험적 관찰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와서 적어도 서구 종교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타당한 입장으로 드러나고 있다. 유럽은 관습적, 의례적인 것 말고는 사실상 무종교의 시대에 진입하여 개인들이 자기 종교를 조립해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선택, 대화와 교류가 빈번히 일어나고 대학의 교양교과목은 다원주의적 종교 및 문화이해를 겨냥한다. (기독교를 버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미국출신 현각 스님이 한 사례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종교계는 한참 낙후되어 있다.)

한국종교전통은 인도에 못지않은 다원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 함석헌의 종교관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간디의 독창적인 종교관과 신앙이 전통적인 인도정신에 뿌리박고 있는 것처럼 함석헌의 종교관도 한국전통과 동양전통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 같은 20세기 두 지성의 종교이해를 넘어서, 21세기 종교와 우리사회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제도화한 종교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공적과 영향을 따져볼 때 선기능이 우세할까 역기능이 우세할까. 인류가 종교의 이름으로 겪은 고통과 전쟁, 갈등을 총합할 때 제도적 종교신앙은 과연 인간의 행복과 발전에 기여했는가, 오늘의 세계와 우리 사회를 돌아볼 때 차라리 무(조직)종교가 사람들을 더 자유롭고 신앙적으로 만들지 않을까. 함석헌은 일찍이 무교회주의에 심취했는데 이는 사실상 무종교주의와 다름 없을지 모른다.

당시 기독교는 그에게 필연적(또는 우연적)으로 주어진 유일의 종교다운 종교였다. 전통적인 유교와 불교는 20세기 초에는 종교다운 역할과 종교의 구실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고유한 민족종교는 이 외래종교들에 눌리고 일제침략자들의 탄압을 받아 자기존재를 드러내지 못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함석헌에게 기독교밖에 사실상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렇게 볼 때 당시의 무교회주의는 오늘날 무(조직)종교주의로 확대할 수 있다.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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