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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영호 제4강] 함석헌과 불교사상-깨달음의 전체성

by anarchopists 2020. 1.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4/16 09:06]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불교사상
깨달음의 전체성


진리와 동일시되는 ‘나’의 실체가 무엇인지 함석헌의 해설을 들어보자.

“그들은 다 모든 사람이 죽어서 한 사람이 일어서는 것은 알았어도, 또 그 한 사람마저 죽어야 하는 줄은 몰랐다. 그 한 사람이 죽어서 전체가 도로 살아남을 몰랐다. 예수는 메시아, 곧 한 사람을 바로 알았으므로 그마저 죽어야 사는 것임을 알았으므로, 그렇게 살았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참 한 사람일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나’를 바로 쓸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능히 ”내가 길이오, 진리요, 생명이다“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죽은 자의 말을 산 자들이 알 리가 없었고, 산 자의 말을 죽은 자들이 알 리 없었다. ”내가 길이요.“ 하니 어리석은 그들이 ”예수가 곧 길이요, 예수가 곧 진리요, 예수가 곧 생명이다“ 하며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이 이름으로써다“ 하니 ‘예수’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어디 예수의 뜻이 그러했을까? 그는 다만 ‘나’라 했을 뿐이다. 내가 누굴까? 모든 사람의 다 죽음으로 서게 되는 내가 예수일까? 그러므로 그는 내놓은 살림을 하게 되면서부터 예수라는 이름을 스스로 부르지 않았다. 다만 ‘사람의 아들’이로다 했지. 모든 사람이 죽어서 내가 있으면, 또 내가 죽어 전체가 살아나야 할 것이다. 그것을 실행한 것이 그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참 나라의 임금이라 했고,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사람들보고 말하였다. 그것이 그가 인류에게 보여 준 살 길이었다.

우리가 바로 알아듣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뭐냐? 끝없이 나감이 나요, 진리를 함이 나요, 삶이 곧 나다. 내 이름이 뭐냐? 길이 내 이름이요, 참이 내 이름이요, 생명이 내 이름이지. 구원이 뭐냐? 이름을 얻음이다. 이름이 어디 있느냐? 이름은 천지에 하나뿐이다. 내 몸에 붙인 이름을 버리고 ‘그 이름’을 받을 때 나는 영원한 존재가 된다. 씨가 떨어진 자리에서야 싹이 나고, 알이 깨진 담에야 닭이 나온다면 죽는 자리, 죽는 시간에야 새가 살아날 것이다. 씨는 나무를 위해 죽은 것이요, 알은 닭을 살리기 위해 죽은 것이다. 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전체를 살려 내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십자가에 내주는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날마다 죽어야 할 것이다. 벌써 죽었으면 벌써 살았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나’가 단순한 개별적 나(個我)가 아니라는 데 이른다. 그 '나'가 예수도 아니지만 개인도 아니다. 사실상 집합적 ‘나’나 ‘우리’에 가까운 것이면서 동시에 근원적 자아, 인도전통에서 주관적 실체인 아트만이나 객관적 실체인 브라흐만 같은 개념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들어난 함석헌의 사유방식의 특색은 집단성, 공동체성, 전체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한 사람의 생각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이 생각하고 같이 실천하며 같이 살아가야한다. 우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이 글은 이승만 정부의 비위를 거스려 함석헌을 잡아가게 만들었다. 6.25 전쟁의 역사적 뜻을 국민이 깨닫지 못한 사실에 대한 지적이었다. “나라를 온통 잿더미, 시체더미로 만들었던 6.25 싸움이 일어난 지 여덟 돌이 되도록 우리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뜻을 깨달은 국민이라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다. 역사적 사건이 깨달음으로 되는 순간 그것은 지혜가 되고 힘이 되는 법이다. 역사적 사건의 뜻을 깨달음은 불덩이를 삼킴이요 올가미를 벗김이다.”(전집14:109) 여기서 깨달아야할 대상은 초월적 실재가 아니고 역사적 사건의 뜻이지만 그 두 가지 깨달음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은 뜻이다. 모든 것의 밑이 뜻이요, 모든 것의 끝이 뜻이다. 뜻 깨달으면 얼(靈),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110) ‘백성’은 국민, 민족이다. 생각의 주체 단위가 백성, 민족이다. “사람은 개인으로 살지만 또 민족으로 살아간다. 민족으로 삶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삶이 있을 수 있다. 이날까지 몇 천 년 민족으로 살아온 전체가 없다면 ‘나’란 것은 있을 수 없다.”(전집9:297) 개인의 경우에 모든 것이 인격적 자각에 달려 있는 것처럼 민족도 하나의 인격으로서 민족적 자각을 필요로 한다.(298-9, 301) “민족은 개인보다는 한층 더 높은 생명이다.”

민족은 전체를 대표한다. 그러나 민족도 궁극적 전체는 아니다. 보다 큰 전체는 인류이다. 하지만 인류도 마지막 전체가 아니다. 그 위에는 우주가 있다. 전체는 자라간다. 그러나 민족국가 시대에는 민족이 전체로서 할 일을 다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민족적 자각과 민족통일이 요청되는 것이다.

함석헌은 하나와 전체를 강조한다. 심지어 전체가 ‘하나-님’이라는 선언에까지 이른다. ‘생각’의 끝에 일어나는 깨달음은 구원이다. 그는 개인구원보다 전체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 일심(一心) 사상, 일승(一乘)사상과 회통한다. 불교는 너와 나, 이것과 저것, 만물이 서로 얽혀 있다는 연기(緣起)론을 말하고 함석헌은 유기적 전체를 이야기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상통한다. 원효에게서 불교전통의 종합이 일어났듯 함석헌에게서 새로운 형태의 종합(synthesis)이 형성되는 모습이다. 그를 통해서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도 구원을 얻게 된다.

함석헌은 우리 민족이 국민도덕과 국민정신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진단했다(1959). 반세기전의 이 진단은 아직도 유효하고 타당하게 들린다. “국민정신이 부족한 것은 또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생각이란 다른 것 아니요, 물질을 정신화함이다.”(전집2:377) 이것은 유물론적 물질주의가 지배적인 가치관이 되어있는 오늘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우리는 생각도 철학도 없는 민족이다. “인도를 인도로 만든 것도 생각이요, 히브리를 히브리로 만든 것도 생각이다. 철학하지 않은 인종은 살 수 없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고유철학이 없는 나라다.” 이 말을 반증하기 어렵지 않을까? 남의 철학이나 수입해 팔아먹고 사는 현실이 아닌가. “살려거든 생각해야 한다. 제 철학을 가지고, 제 종교를 가지고, 제 역사를 가지고, 제 세계를 가져야 한다.”(378) 함석헌의 사상, 아니면 그가 뿌린 사상의 씨앗을 되새겨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영호, 내일 계속)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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