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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영호 제5강] 함석헌과 불교사상- 고통과 수난

by anarchopists 2020. 1.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4/17 08:29]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불교사상
고통과 수난

함석헌의 전체론적, 전일적 사고는 고통의 철학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는 개인의 고통보다는 전체의 고통에 관심을 둔다.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전체의 현실적 단위는 민족이다. 다른 민족의 고통은 동정은 할지언정 우리에게는 당장의 눈앞의 현실이 아니다. 당장 우리의 이웃, 아니 우리 자신이 문제이다. (북한인민도 우리요 이웃이라고 생각하는지 의문이 일어나는 현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맥락에서는 스스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함석헌처럼 민족주의자도 없다고 할 것이다. 민족주의는 어쩔 수 없는 역사와 지금의 현실이며 인류가 다음 단계로 진화할 때까지는 당분간 가까운 미래에도 현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인간이 생로병사 과정에서 겪는 고통, 즉 인생고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고통의 실체를 보고 극복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이 그가 성취한 대각의 내용을 구성한다. 고통을 여읜 상태가 ‘열반(涅槃)’(nirvana)이다. 열반을 체험(證得)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그것이 고통과 윤회의 악순환을 끊는 길이다. 그래서 열반을 (윤회의) 벗어남 즉 해탈(解脫)이라고도 표현한다. 그 방법이 네 가지 성스러운 원리 즉 ‘사성제’(四聖諦)에 함축되어 있다. 그 첫째 원리가 ‘고통’(苦)의 존재사실, 둘째가 그 원인(集)으로서 욕심의 존재, 셋째, 고통의 없어진 상태(滅)의 확증, 넷째, 그 방법(道)으로서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로 제시된다.

함석헌이 석가가 찾아낸 원리(佛法)를 인지하거나 사유나 명상을 통해서 확증했다기보다는 20세기 내내 ‘수난의 여왕’ 이 민족이 걸어온 험난한 삶을 앞장서서 걸으면서, 그리고 한민족의 역사를 민중사로 새로 조명하면서, 찾아낸 원리가 바로 ‘수난’의 민족, ‘수난’의 역사였다. 정의롭지 않은 어떤 체제에서도 맞서면서 산 그의 생애 자체가 어떤 민족구성원보다 고난에 가득 찬 것이었고 그 속에서도 어떤 불자에도 못지않은 무욕, 무집착,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할 만하다. 개인의 고통은 집단, 전체의 고통과 뗄 수 없는 유기적, 연기적 관계에 있음을 간파했던 것이다. (‘무소유’를 강조한 법정스님이 함석헌선생과 의기투합하여 『‘씨알의 소리』를 내는 데 동참한 것은 전혀 생소한 일이 아니다.)

이 고난 사상은 함석헌에게도 계시처럼 다가온 깨달음이었다. 그는『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어디서인지 까닭을 설명할 수 없이 내 마음 속에 들어온 것이 이 고난의 역사라는 생각이었다”(전집1:16)고 기술한다. 이 고난의 종교적 차원은 기독교에서 연유된 것이다.

“고난이란 말은 위에서 말한 대로 기독교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의 입장에 서서 마치 예수라고 하는 하나의 개인이 인격으로 나타낸 것을 역사에서 하나의 민족에다가 적용해보자는 것입니다. 예수가 고난을 받은 것은 말하자면 실패라면 실패고 부끄러움이라면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것을 한없는 영광으로 여깁니다. 그 까닭은 그것으로 인해 인류가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1:385)”

이렇듯 함석헌은 성경의 메시아사상을 기초로 하여 역사를 보면서 “그걸 다만 개인인 예수라하는 데만 보는 건 아니고 인류 전체, 또 우리에게서 말하면 직접 민족 속에서 보자고 하는”(1:396) 입장이었다. (이것이, 역시 이 책에서 제기된 민중사관과 더불어, 나중에 안병무와 서남동이 중심이 된 민중신학의 전개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 책의 원래 제목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라 한 것이다. 나중에 그 자신의 종교관이 다원주의적 지평으로 열리게 되면서 ‘뜻’이라는 보편적 개념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어떻든 예수의 수난(‘Passion of Christ’))이 독특한 고난사관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지만, 함석헌은 자기 나름으로 고통의 보편성을 드러냈고 이것이 불교와의 한 가지 접촉점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함석헌은 불교에서처럼 고통자체의 극복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더 긍정적인 입장이다. “고(苦)는 생명의 근본 원리다. 고(苦)를 통해 자유에 이른다.”(1:21) 함석헌에게 고통은 즐거움(樂)과 이분법적으로 유리된 상태가 아니다. “고(苦)를 피하고 낙(樂)을 맞으려는 사람은 영원히 고(苦)를 못 면할 것이요, 선(善)을 사랑하고 악(惡)을 미워하려는 사람은 영원히 선(善)을 보지 못할 것이다.”(1:21) 불교수행이 목표로 삼는 이고득락(離苦得樂)만은 아니다. 물론 대승불교에서 이고치고(以苦治苦)의 방법도 제시되고 대승 공관(空觀)사상에서는 선악, 고락의 분별도 지양되지만, 함석헌이 고통의 문제를 더욱 긍정적,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떻든 함석헌이 고통의 문제를 개인구원의 차원을 떠나서 집단구원, 사회구원, 전체구원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독창적이다. 물론 대승불교에서도 보살정신이 표방하는 중생구원이 이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에 나타난 자각(보리)과 중생교화(구제)의 이원적 목표의 설정에서처럼 깨달음과 더불어 개인적 차원이 아직도 무시되는 모습은 아니다.

이러한 함석헌의 구원론이 전통적 기독교의 개인주의적 구원론보다는 다른 차원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가롯 유다의 입장을 기존의 기독교 교리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유다가 저주받아 마땅한 배반자가 아니고 “전 인류의 짐을 맡아 진” 자이다. 열 두 제자는 전체의식을 못 가진 “순전히 개인주의자”였다. 지금이라도 지옥이든 어디든 가 있는 곳에서 “유다가 마음을 열어야 세계구원은 온다”는 것이다. “유다가 지옥 밑바닥에서 이를 빠드득 빠드득 갈고 있는 한은 천당이 무사할 수 없다.”(전집3:317)

이 명상(‘펜들힐의 명상’)은 함석헌의 사유에서 큰 전환점이 된다. 그 "이상한 체험“은 일종의 대각으로 전체론적 사유의 완결을 의미한다. 이 해석은 전통적 기독교신학을 벗어난 혁명적 발상이다. 기독교는 물론 불교도 함석헌을 통해서 새 지평이 열리고 있다.(김영호, 내일 계속)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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