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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김영호 제2강] 함석헌- 비폭력 사상 및 실천

by anarchopists 2020. 2.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14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김영호의 함석헌을 말한다-2]


비폭력 사상 및 실천


함석헌의 핵심사상은 비폭력이다.
간디하면 비폭력 투쟁이 연상될 정도로 비폭력주의는 간디의 핵심사상으로 자리매김 된 개념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바로 이 사상 때문에 ‘한국의 간디’로 불릴 만큼 함석헌도 비폭력주의와 뗄 수 없는 관련을 갖는다. 비폭력사상은 두 인물의 주요한 접점이 된다. 간디를 몰랐더라도 함석헌이 폭력주의를 선양했을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채택한 기독교나 그가 속한 한국 및 동양 종교전통이 평화주위와 비폭력주의의 온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비폭력을 사회민주화의 도구로 주창한 것은 간디를 통해서였다. 그가 번역한 간디 자서전과 간디에 대한 해설만으로도 비폭력의 진리성과 도구성을 충분히 선양했다고 할 수 있다. 간디를 이 땅에 소개한 것만으로도 그는 자기 몫을 충분히 한 셈이다. 그가 더 보태서 따로 자기주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실천과 적용이 남았을 뿐이다. 간디가 그 원리의 근거와 타당성 그리고 방법론을 다 개발해놓았기 때문이다.

간디가 주창한 비폭력 사상은 그가 새로 발견한 것이 아니다. 모든 종교에 공통적인 요소이다. 기독교의 계명(‘살인하지 말라’)에도 들어있다. 다만 이 계명은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갖는다. 인간이외의 만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인도에서 기원한 종교들은 살생(殺生)으로 확대된다. 대다수 인도인이 지키는 채식주의가 그 결과이다.

불교의 첫 계율이 바로 불살생(不殺生)(ahimsa)이다. 그 극단적인 모습은 자이나교에서 나타났다. 식물, 미생물은 물론 무생물까지 그 대상이 된다. 마스크착용, 나체와 아사(餓死)가 장려될 정도이다. 어원적으로 ‘ahimsa’는 ‘불살생’과 ‘불상해(不傷害)’의 뜻을 지니고 있다. 간디는 부모 쪽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간디는 비폭력(non-violence)의 원리를 내세우면서 전통적인 계율을 살상(殺傷)에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폭력과 강제행위로 확대했다. 그 점에서 그는 기독교 윤리를 참고하였고 특히 기독교 정신을 비폭력무저항으로 해석한 톨스토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구체적으로 그는 어릴 때 “모든 악에 대해서 선을 행하라‘는 구자라트(모국어) 시 구절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는데, 나중에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라도 네 오른 뺨을 때리거든 다른 뺨도 돌려대라”는 예수의 산상수훈을 성서에서 읽고 환호작약하고 자신의 소신이 확인되었음을 알았다.

힌두교 고전 『바가바드 기타』는 그 인상을 심화시켰고 톨스토이의 『천국이 네 안에 있다』는 그 신념에 못을 박았다. 따라서 간디는 비폭력을 보편적 윤리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밝혀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처럼 내세운다. 진리나 사랑은 추상적이다. 그 구체적인 표현이 비폭력이다.

전통적인 개념의 확대 말고도 비폭력개념이 갖는 중요한 특징 또 한 가지는 집단에 대한 적용이다. 종래 윤리는 개인 차원에만 적용되는 것이 일반이었다. 예를 들면, 개인의 살인 죄가 되어도 군대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오히려 훈장을 받는 일이었다. 함석헌이 인용한 시구처럼 장군이란 “수많은 백성들의 뼈다귀가 쌓여서”(百姓萬骨帖) 얻은 감투다. 국가라는 이름 밑에, 왕명이라는 것으로, 전쟁이 정당화되어온 것 아닌가. 이러한 관점을 바꾸어 전통을 끊는다면 세계평화는 당장 이루어질 것이다.

남북의 분단도 하루아침에 극복될 것이다. 개인윤리와 집단윤리의 괴리가 문제였다. 라다크리슈난이 확인했듯이, 인류 역사에서 비폭력의 원리를 개인 차원에서 사회적 및 정치적 차원으로 확대한 것은 간디가 처음이었다. 계명, 계율의 집단적 실천에 평화의 열쇠가 들어있다.

비폭력은 간디가 주장하고 체계화한 셈이지만, 함석헌이 그것을 선 듯 받아들인 것은, 다른 사상에 있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의 내면에서 자라온 생각과 마주침이라할 수 있고, 우리 민족의 성격이 평화지향적이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그가 말하듯 처용가 설화에서도 확인 되는 모습이다. 무수한 외침을 당하면서도 단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입해본 적이 없었다는 점, 민족 고유종교를 대표하는 선(仙) 전통이 평화지향적이라는 점을 든다.

그러나 조직적인 면에서 간디와 함석헌에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마치 인도와 한국의 문화차이, 인도인과 한국인의 국민성의 차이와 같을 수 있다. 물론 두 개인의 경력과 투쟁과정에도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변호사로 많은 사회경험을 살려 실무에 능하고 아울러 종교적 진리의 실험과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다른 사람은 인도의 영국지배보다 더 악랄한 식민지 환경에서 도덕적으로 파산된 나라에서 여러 전쟁과 독재를 몸소 겪으면서 연명하기 급급한 일생을 살아야했다.

인물은 인물에서만 난다
간디의 조직적 비폭력 진리파지 운동의 추진의 배경에는 수억의 인도인이 있었다. 그럴만한 환경의 차이가 있었다. 외적으로는, 그것은 신사적인 영국통치와 사무라이식 일본통치의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내적으로는, 민족을 두고 말한다면 인물을 기르고 받들어 결집하는 민족성이 아니었다. 그가 원래 간디 자서전 서문에 쓰려던 글이 최근에 발견되었는데 그 글에 이런 한탄이 있다.

“간디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얻은 좋은 인상의 하나는 그 인맥의 장관이다. 히말라야는 못 가봤지만 간디의 입을 통해서 그려지는 일물의 군봉의 맥을 이루어 서는 것을 보면 히말라야를 바라는 것 같다고 하고 싶어진다. 하늘 아래 그에서 더 웅장한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또 한편 가슴속으로 흘러드는 눈물을 금치 못했다."

우리 인맥의 너무도 낮고 적음을 한해서 말이다. 나라는 본래 혼자서는 못하는 것인 줄 알지만 어찌도 이 나라는 이럴까? 간디의 운동은 간디 혼자의 운동이 아닌 것을 알았다. 동시에 우리의 일이 어려운 것이 당연함을 알았다. 그 때문에 한층 더 슬펐다. 쉽게 말하자. 이씨 조선 오백 년에 한 일이 사람 죽인 것밖에 없다고 하면 과장이라고 할까?

오늘 우리같이 인물이 필요한 때는 없는데 인물이 없다. 특히 정치에서 그렇다. 왜 그런가? 재목은 숲에서만 난다면 인물은 인물에서만 난다. 전에 인물이 없었는데 지금 어디서 인물을 구하겠나? 일본 오기 전에 벌써 정치 없은지 오래다. 있은 것은 싸움뿐이요, 사람 죽이기 내기뿐이었지. 이성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싸움은 하면서도 나라를 위해 사람 종자는 아껴 두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이기는 것만 알았고 미워하는 것만 알았다. 그래서 사람 중에 체격깨나 있고 생각깨나 하고 말깨나 하는 놈은 서로 죽이다 보니 마지막에는 부지깽이에 쓸 만한 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갑자기 스승을 찾은들 스승이 어디서 나며, 장군을 찾은들 장군이 어디서 나겠나?

있는 것은 너나 나나 꼭 같은 벼슬아치라는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인물 기피증이 들어 버린 것이다. 구차한 인간 이하 살림을 하기 위해 집안에 쓸 만한 자식은 아주 아니 낳기로 결심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상이 돼지처럼 북데기를 쓰고 얼굴을 들지 말고 살아가는 사람도 짐승도 아닌 것을 길러가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혹시 천지 생명의 법칙에 의해 돌변화한 듯 좀 기골이 있고 생각이 깊은 것이 나면 아예 없애 버렸다. 그 결과가 오늘이다. (『씨알의 소리』2008년 제3호 120-21)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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